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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급 기관 및 지방 행정시설편

조선총독부의 건축기구와 건축도면의 생산

일본은 대한제국과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第2次 韓日協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새로운 기구를 본격적으로 조직하여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한 관립시설 건립을 목적으로 1906년 9월 24일에는 칙령 제55호로 <건축소관제(建築所官制)>가 공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탁지부(度支部) 산하에 건축소(建築所, 1906년 9월~1910년 8월)가 설치하였다. 이렇게 설치된 탁지부 건축소는 이전까지 궁궐 영건 및 개수(改修) 등을 담당해온 영선도감(營繕都監) 또는 공조(工曹)를 대신하는 최초의 근대적 상설건축기구라고 할 수 있으며, 전국의 관립시설의 건립을 관장한 건축기구였다.

탁지부 건축소는 근대 건축물의 건립을 위한 상설 기구라는 점과 이를 통해 생산된 건축기록물이 근대적 제도 속에서 관리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건축기구와 차이가 있다. 앞서 운영되었던 건축기구인 영선도감은 시설이 건립될 때마다 임시로 설치되던 기구로 관련 건립 기록은 해당 건물의 완공 이후 자료가 재정리되어 의궤로 편찬, 보존되었다. 이러한 기록 방식은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에 기안제도(起案制度)와 원본 위주의 보존방식이 도입되고, 근대적인 기록물 관리 방식이 적용된 기록관리 전담 기구가 설치되는 등 개편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건축 사업과 관련된 자료는 여전히 기존 방식에 따라 개별 사업별로 진행된 뒤에 의궤 형식으로 편찬되었다. 이러한 방식과 달리 탁지부 건축소에서는 탁지부 건축소는 건축공정 전반에 걸친 업무를 담당하면서 생산된 설계도면, 시방서, 공사예산서 등의 관련 자료를 원본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는 기록물의 원본질서(原本秩序)를 확보함으로써 기존의 기록 방식이 가지고 있는 기록물의 신뢰성 문제를 해소하고 건축물의 유지 관리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편, 탁지부 건축소 운영의 실질적인 권한은 개설 이후 점차 일본에게 넘어가게 된다. 개설 당시 소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직위에 한국인들이 임명되었었으나 1907년 12월 13일 칙령 제42호에 의해 관제가 개정되어 일본인 탁지부 차관이 건축소 소장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1906년의 설치령 및 1907년의 관제 개정을 바탕으로 탁지부 건축소의 산하 부서와 그 업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탁지부 건축소는 실무 부서로서 공사부(工事部)를 설치하여 건축 업무와 토목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고, 감독계와 영선계를 운영함으로써, 조사, 계획, 내역 뿐 아니라 시공, 감리 등 건축물 건립공사 전 과정을 맡도록 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는 출장소를 개소하여 전국의 공사현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토록 하였으며, 연와(煉瓦, 벽돌)의 원활한 수급을 위하여 연와제조소(煉瓦製造所)를 설치하고 직접 생산하게 하였다. 또한 산하에 회계과를 두고 문서와 직원의 관리 및 예산, 계약, 회계 등의 각종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탁지부 건축소에서 1907년 3월부터 1909년 6월까지 생산된 기록물은 8,000건에 이르고 있으며, 이 중 공사에 관한 기록물은 무려 3,200여 건에 달한다. 또한 시기가 지남에 따라 공사 관련 서류의 수량이 급속하게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의 일제강점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탁지부 건축소에서 활발한 관립 건축 활동이 전개되었다는 것은 일제가 이미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제반 시설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금번 해제집의 대상인 행정시설의 건축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탁지부 건축소의 조직을 흡수한 조선총독부의 건축조직은 여러 차례의 개편을 거치면서 점차 세분화된 대형 조직으로 변화되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최고 통치기구가 된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행정조직 전체를 개편하였는데, 이에 따라 탁지부 건축소가 해체되었고 그 기능은 조선총독부 및 부속 관서에 설치된 건축담당 부서가 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 1928년에는 철도시설과 체신 시설을 제외한 관련 업무가 조선총독부 산하 영선계(會計課 營繕係)로 통합되었다. 이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광화문의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비롯한 관립시설에 대한 주요한 신축사업이 완료됨으로써 건축 업무가 감소한 것이 기구를 다시 단일화하게 된 주된 요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각종 건축공사를 담당하는 민간 건설업체가 성장함에 따라 설계와 공사는 건설업체가 담당하고 관의 건축조직은 공사발주와 감독만을 담당하는 행정감독기관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도 그 원인이 되었다. 1934년경에는 단일 조직으로 운영된 영선계 조직을 세분화하여 건축공사를 담당하는 영선1계와 영선2계, 설비공사를 담당하는 영선3계로 편성하였다. 1939년에는 조직을 좀 더 확대하여 영선3계도 건축 업무를 담당하게 하고 영선4계를 신설하여 설비공사를 맡도록 하였다. 또한 행정을 담당하는 영선사무계를 별도로 구성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직 개편은 조선총독부 건축 조직이 점차 전문화되고 체계화된 대형 조직으로 변화해 나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대량의 건축물들이 새롭게 조영되고 개수됨에 따라 생산된 대량의 기록물에 대한 분류와 보존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로 인하여 생산된 기록물에 대해서 보존기간을 부여하게 되었는데, 기록물에 적용된 이러한 보존기간 규정은 공문서 관리에는 최초로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무수하게 생산되는 건축 기록물을 그 중요도에 따라 선별하고 그에 따라 보존기간을 달리하여 효율적으로 기록물을 관리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당시의 기록물 보존 규정에 따르면, 공사의 계획에 관한 중요서류 및 평면도, 직영공사의 설계와 공사청부계약에 관한 중요서류 및 회도면, 관유재산에 관한 서류, 회계장부, 문서원부 등을 무기한 보존 하도록 하였고, 관립 건축기구에서 생산된 건축기록물들 중 최종 계획안이 반영된 설계원도는 영구보존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건축기록물의 보존기간은 건축물의 역사적ㆍ심미적 가치보다 행정적ㆍ재무적 가치에 따라 설정되었기 때문에, 영구보존이라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작성한 시점이 오래된 문서부터 점차 폐기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관영 공사에 관한 자료는 이른 시기로 올라 갈수록 소량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설계원도 만큼은 건축물의 유지관리 및 유사사례 참조용 등으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폐기되지 않고 다수가 보존되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일제강점기의 설계원도는 이런 규정에 근거하여 보존되었으며,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서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관련된 일반문서들은 설계원도에 비해 비교적 보존 가치가 적어 폐기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해당 건축물 건립의 전 과정을 추적하고 그 의미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