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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자혜의원

평양자혜의원은 1910년 9월에 개원한 10개 자혜의원 중 하나로서 총독부고시 제208호로 1910년 9월 6일에 평안남도 평양에서 개원하였다. 이후 1925년 4월 1일「조선도립의원관제(朝鮮道立醫院官制)」및「도립의원규정(道立醫院規程)」이 시행되면서 평양자혜의원은 평안남도립평양의원으로 개편되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평양자혜의원에 관련된 56매의 도면이 소장되어 있다.

명칭 연도 도면수
평양자혜의원 1910.09 - 1925.03 56매

평양자혜의원은 수원자혜의원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의 왕실시설을 전용하여 사용한 의료시설이다. 수원자혜의원이 수원의 화성행궁을 점용하였던 것처럼, 평양자혜의원은 1902년(光武6)에 평양성의 외성에 건립한 대한제국기의 행궁, 일명 황궁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던 풍경궁(豊慶宮)의 부지와 건물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초기 개원 당시부터 풍경궁에 입지한 것은 아니었다. 1910년 개원 이래로 방문 환자가 급증하여 병원 공간이 협소해졌을 뿐만 아니라 정거장으로부터 멀기 때문에 진남포, 안주, 원산 등지의 환자들이 방문하기에 어려움이 있어 병원 신축을 고려하였는데, 비용 상의 문제로 풍경궁을 빌려 쓰는 것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원래 풍경궁은 1902년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고종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대한제국의 이궁으로서, 고종이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아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군제개편을 시도하면서 건립한 국가적 시설이었다. 그러나 1908년에는 풍경궁의 관제(官制)가 폐지되었고, 봉안되어 있던 어진은 덕수궁 정관헌으로 이전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빈 채로 있던 풍경궁은 한일합방 이후에 잠시 무료 기숙사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가, 평양자혜의원이 풍경궁을 사용하기로 함에 따라 1913년에 총독부 기수(技手)가 현장을 답사하고 설계를 진행하였다.

1923년에는 당시 평양자혜의원의 건물 규모와 시설이 병원으로서 적합하지 못하다는 판단에 따라 길이 40칸, 폭 8칸의 2층 벽돌조 건물을 설계하여 향후 2년 내에 완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25년에는 간호부기숙사로부터 화재가 발생하여 10개동을 태우는 사고가 발생하였으며, 1934년에는 건물의 손상이 오래되고 좁고 불편하다는 문제점이 있어 제3병실 2개동을 새로 건립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풍경궁의 많은 전각들이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훼철 이전 풍경궁의 배치는 [도판1]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풍경궁의 주요 전각들은 중심축을 따라 정남향으로 배치되었는데, 황건문(皇建門), 정전인 태극전(太極殿), 그리고 편전(便殿)인 지덕전(至德殿)이 일직선의 축 상에 배치되고 동궁전(東宮殿)인 중화전(重華殿)은 중심축에서 우측으로 치우쳐 전체적으로 ‘⎾’ 모양을 이루었다. 이 건물들은 1913년에 평양자혜의원으로 계획되면서 모두 증개축되었다.([도판2] 참조)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석교가 있는 행랑(行廊)은 무료 진료환자를 위한 시료병실(施療病室)과 창고 및 정신병실로 변경되었다.([도판3] 참조) 풍경궁의 정전인 태극전은 회의실, 연구실 및 도서실로 변경되었다.([도판4] 참조) 태극전을 둘러싼 회랑은 중앙의 삼문을 막고 방으로 꾸며 수납환자의 병실로 변경하였는데, 병실에는 온돌과 다다미방을 반반씩 조성한 점이 특징이다.([도판5] 참조) 편전인 지덕전 일대는 전염병 환자를 위한 병실로 변경되었고,([도판6] 참조) 무료진료 환자를 위한 시료전염병실(施療傳染病室)은 뒤편에 별도로 신축 조성하였다. 지덕전 전면의 회랑은 병실로 개조되어 태극전이 있는 수납병실(收納病室)과 연결시킴으로써 전염병실과는 동선을 명확하게 구분되도록 하였다.([도판7] 참조) 한편 동궁전인 중화전은 외래진료실로 변경되었다.([도판8]참조) 전각의 월대(月臺)와 접한 퇴칸은 환자대합실의 현관으로 변경되어 계획되었다. 환자대합실 주변으로는 안과, 이비인후과, 외과가 배치되었고, 복도를 통해 연결된 우측 건물에는 부인과, 내과, 소아과, 약국이 계획되었다. 환자대합실에서 북편으로 계획된 복도의 끝에는 수술실이 새롭게 계획되었고,([도판9] 참조) 그 우편으로는 간호부기숙사가 있었다.

이와 같이 1913년 풍경궁 경내에 계획된 평양자혜의원은 시료병실, 수납병실, 전염병실 및 외래진료부의 네 개 구역으로 크게 구성되어 있었다. 개별 구역은 가능하면 타구역과 배타적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출입구를 달리하고 있지만 건물 내부에서는 복도를 통해 연결되도록 계획되었다. 다만, 무료진료에 해당하는 시료병실, 시료진찰실(외과, 내과)의 경우는 병원의 전면부에 다소 독립적으로 배치된 것이 특징적이다.

건물을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실내면적을 최대한 확보함과 동시에 대체로 건물의 사면이 외부에 개방적으로 건립되어 있는 한옥을 관리가 용이한 밀폐된 실내공간으로 변형하려는 계획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기존 목조 건물의 내부에 계획하기 어려운 변소, 수술실 등은 몸체건물과 거리를 두고 신규로 조성하되 복도로 연결하여 일체화하였다. 흙바닥이었던 회랑에는 바닥을 깔아 병실 등의 공간으로 변경되었다. 건물의 퇴칸이나 툇마루는 벽과 창호로 구획된 내부복도로 변경되었는데, 일부 공간이 협소한 부분에는 새롭게 복도를 증축하였고 건물과 건물 간에도 복도를 설치하여 전체 공간을 일체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내부화된 실내는 별도로 조성된 현관을 통하여 출입하도록 하여 방문자 및 환자들의 관리를 용이하게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안 많은 수의 한옥이 근대시설로 변경된 사례가 있으나 평양자혜의원과 같이 대단위의 한옥이 개축된 사례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1913년에 계획된 평양자혜의원은 기존의 전통 목조 건축물을 개축하여 용도 변경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건축적 해결방안을 통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23년에는 증가하는 환자에 대응하기 위한 시설확충의 일환으로 태극전 일곽 동쪽의 공터에 신축병실을 계획하고 복도로 기존 병실과 연결하였다.([도판10] 참조) 병실은 지하1층, 지상2층의 건물로 계획되었으며, 1,2,3등 병실 및 특등병실로 구성되었다.([도판11] 참조) 건물은 벽돌벽을 기본으로 일부에 철근콘크리트 바닥판을 사용한 ‘철근콘크리트 혼용 벽돌조’로 계획되었다. 입면에는 규칙적으로 창문이 배열되었으며, 비교적 단순하게 마감되었다. 이후의 평양자혜의원의 변화에 대해서는 자료가 충분치 않으나, 1925년 1월에 건물 10여 채를 태우는 사고가 있었고, 1934년에는 병실을 추가하는 등의 경과로 미루어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기존 건물들이 신식 건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참고도판]
  • 도판1. 평양자혜의원신영설계도/재래건물배치도/14, 191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2. 평양자혜의원신영설계도 모양체간취도/12, 191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3. 평양자혜의원신영공사설계도/시료환자병실급취사장병창고기타모양체수선지부/9, 191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4. 평양자혜의원신영설계도/회의실모양체설계도/1, 191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5. 평양자혜의원신영설계도/수가환자병실모양체수선지부(병도랑하신설)/10, 191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6. 평양자혜의원신영설계도/전염병실모양체지부/4, 191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7. 평양자혜의원신영설계도/수가환자병실모양체수선지부(병도랑하신설)/6, 191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8. 평양자혜의원신영설계도/각과진료소급환자대합소기타각실증축급모양체수선지부/16, 191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9. 평양자혜의원신영설계도/수술실부속도랑하급기타지부/23, 191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10. 평양자혜의원신영설계도/각과진료소급환자대합소기타각실증축급모양체수선지부/10, 1923년 추정상세보기
  • 도판11. 평양자혜의원병실신축공사설계도/1-1,2, 1923년 추정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