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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록의 재발견

국무회의록의 재발견

5차 개헌

제5차 개헌의 배경

제5차 개헌의 배경

 1961년 5.16 군사정변로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서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내각책임제의 헌법 기능이 중지되었다. 5.16 군사정변이 헌법 하에서 불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한 것이었기 때문에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군인들과 미국은 헌법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따라서 국회의 해산과 함께 국무총리와 국무원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실권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통령은 그대로 자리를 유지하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하여 국무원과 의회의 기능을 겸하도록 하였다.1)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모든 권한을 갖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헌법상 기관인 국무원과 국회가 없기 때문에 군사정변 직후 군사정부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다. 그 중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국무원의 기능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군사정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각부 장관을 임명하도록 하고, 이들로 하여금 각의를 구성하게 하였다. 이후 제3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각의는 헌법 상 규정된 국무원의 각종 의무를 수행하였다.

헌법 42조 및 제66조 적용
  • 대통령 유시 – 헌법개정 언급

    1961년 5월29일에 개최된 제7회 각의에서는 헌법 제42조와 제66조에 규정된 외국과의 조약을 국무원이 승인하도록 하는 조항과 대통령의 임무에 관한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각의가 국무원을 대신하여 조약을 승인하고,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서는 각의가 함께 서명하도록 규정하였다.

제5차 개헌의 배경

 각의가 국무원의 역할을 대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정부는 민간인 정부(민정)로 권한을 이양함으로써 헌법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5.16 군사정변 당시의 소위 ‘혁명공약’에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미국으로서도 자국이 지원하고 있는 동맹국에서 헌법질서가 정지됨으로써 국내외에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가능한 한 빨리 민정이양을 해야 한다는 점을 군사정부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군사정부가 기존의 헌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민정이양을 할 것인지, 아니면 헌법을 개정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1년 8월1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3월까지 새 헌법을 제정하고,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에는 새로 개정될 헌법은 대통령 책임제와 단원제 국회의 내용을 골자로 할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1963년 초에 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규제도 풀어줄 것이라고 점도 포함되었다.2) 박정희 의장에 의한 성명은 이후 개헌 논의와 새로 개정될 헌법의 기본적인 틀이 되었다.

헌법 개정 논의

헌법 개정 논의

 1962년에 들어서면서 헌법 개정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8.12 성명에 의하면 개헌은 1963년 3월까지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1962년 말까지 헌법 개정을 완료해야 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7월11일 산하에 헌법심의위원회와 전문위원회를 발족했다. 헌법심의위원회에는 이주일 최고회의 부의장(위원장), 김동하 국방위원장, 조시형 내무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김윤근 교체위원장, 김용순 문교사회위원장, 오치성 운영기획위원장, 길재호 법사위원, 이석제 법사위원장 등이 참여하였으며, 대부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군인 출신들이었고, 법에 대한 전문가들이 아니었다. 더보기 ▼


 전문위원에는 법조계에서 유진오 고려대 교수, 이종극 연세대 교수, 박일경 법제처장, 한태연 서울대 교수, 이경호 법무부 법무국장, 강병두 국민대학장. 정치학계에서 민병태 교수, 김성희 교수(이상 서울대 문리대), 윤천주 교수(고려대), 경제학자 최호진 교수(연세대), 신태환 교수(서울대), 성창환 교수(고대, 최고회의 의장 고문). 행정학자 김운태 교수(동국대), 행정법 김도창 교수(서울대 법대), 국제법 이한기 교수(서울대, 최고회의 의장 고문) 등이 참여했다. 학계 외 인사로 이영섭 대법원 판사, 신직수 최고회의 의장 고문, 박천식, 조병완, 유민상 법사위 자문위원 등이 참여했다.3) 헌법심의위원과 전문위원에 정치인이 전혀 임명되지 않았는데, 정치인들은 5.16 군사정변 직후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국회는 해산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전문위원회는 1962년 7월26일부터 회의를 시작하였다. 헌법심의위원회 회의실에서 개최되었으며, 이석제 법사위원장과 길재호 법사위원이 간사로, 사무국장에 안경렬이 참석하였다.4) 1차 회의는 다양한 가능성을 놓고 논의하자는 의견이 제일 많았는데, 신직수 최고회의 의장 고문은 이 논의에서 제일 중요한 전제가 되는 것은 박정희 의장의 8.12 의장 성명이기 때문에 그 전제 위에서 모든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8.12 의장 성명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 책임제로, 양원제를 단원제로 개편하는 방향만 제시한 것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우선 논란이 되는 쟁점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문위원회는 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중요한 쟁점을 찾아내지 않을 경우 논의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소위원회는 유진오 주재로 박일경, 이종극, 문홍주, 강병두, 이경호, 신태환, 민병태, 한태연 등 9인으로 구성되었데, 헌법 전문가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 개정의 주체였다. 기존 헌법에 의하면 헌법 개정은 입법부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국회가 해산되고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헌법을 개정할 주체를 정해야 했다. 군사정부는 그 주체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의 헌법심의위원회와 전문위원회로 정했다. 헌법에 따르지 않고 헌법 개정을 시도하면서 제일 먼저 부딪힌 문제가 헌법의 수정이 개정인지, 새로운 제정인지의 문제였다.5)

 헌법의 전면적인 수정뿐만 아니라 절차 자체가 과거의 헌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태연 교수는 사실상 개정이 아니라 제정이라고 주장했다.6) 유진오는 제정이나 개정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제정이냐, 개정이냐의 문제는 과거로부터의 계승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느냐, 아니면 새롭게 출발하느냐의 문제였다. 이는 새로 민정이양이 이루어질 경우 이를 제3공화국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제1공화국으로 할 것이냐를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을 ‘혁명’으로 부르고 있었던 군사정부의 입장에서는 ‘개정’보다는 ‘제정’으로 하여 완전히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선명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비롯해서 핵심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쟁점을 소위원회에서 정했는데, 이 중 흥미로운 점은 고문과 관련된 논의였다. 유진오와 한태연은 1차 소회의 논의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논쟁을 벌인다.

“유진오: 헌법을 보면 고문을 못한다는 것이 있지 않아요? 그것을 당연하다고 보았는데 가만히 눈치를 보니까 그 사람들 얘기는 고문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 같아요. 저이들 눈치로서는 고문을 못하게 헌법에까지 넣으면 곤란하다는 눈치 같았어요.
한태연: 그런 것까지 금지한다면 우리나라 수사진용 같아서는 하나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박일경: 고문문제는 나중에 얘기합시다.”(국회, 헌법개정심의록, 제1집, 66∼67쪽)

헌법 제정 또는 개정과 관련하여 쟁점이 될 또 다른 문제는 지방의회 선거 문제와 대통령에 대한 경제자문회의를 설치할 것인가의 문제였다.7) 장면 정부의 헌법에서 규정하였던 지방정부에 대한 직접 선거뿐만 아니라 경제관련 자문위원회를 헌법 기관으로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제기되었다. 전문위원회를 거쳐서 7월24일 전문위원회 전체회의를 통해 헌법 개정과 관련된 핵심문제를 확정하였다.8) 여기에서 논의하기로 확정된 문제는 아래의 12개 문제였다.

① 헌법전문
② 기본권의 내용과 보장방식
③ 정당조항의 규정 여부
④ 국회의 단원제 여부
⑤ 권력구조 대통령제 여부
⑥ 법원의 구성과 위헌법령심사권 부여 여부
⑦ 지방자치단체의 종류 및 그 장의 선임문제
⑧ 경제조항과 경제심의기관의 설치 문제
⑨ 헌법재판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설치 문제
⑩ 헌법개정 절차
⑪ 경과규정의 내용
⑫ 개정이냐 제정이냐의 문제

이를 위하여 아래와 같이 분과위원회를 만들어 각각의 논쟁점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1분과위원회: 헌법 전문 및 전반적인 문제(위원: 문흥주, 유민상, 한태연 조병완)
2분과위원회: 기본권 법원, 헌법재판소(위원: 유진오, 이영섭, 박천식, 이한기, 이경호)
3분과위원회: 국회, 정부, 지방자치(위원: 이종극, 신직수, 강병두, 윤천주, 김운태, 김도창, 민병태, 김성희)
4분과위원회: 경제 재정문제(위원: 신태환, 최호진, 성창환, 박일경) 닫기 ▲

개헌의 문제점
  • 개헌의 문제점(제75회)

      전문위원회에서 결정된 문제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부에 회람이 이루어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원들은 각각의 쟁점 사안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법무부에서 작성한 1962년 9월7일자 문서 "각의 보고사항: 개헌의 문제점"은 쟁점 사안에 대한 각 부서 및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들의 의견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헌법 전문에 관한 문제는 ‘개정이냐, 제정이냐’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주목되는 점은 5.16 군사정변뿐만 아니라 4.19를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5.16 군사정변 직후 군사정부가 자신들이 4.19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밝혔던 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헌법 전문에는 ‘의거’로 규정되었다. 더보기 ▼

     기본권의 내용과 보장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는 장면 정부의 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이익배분에까지 확대하고 있으며, 기본권이나 언론의 자유 등을 지나치게 보장함으로써 사회 혼란을 가져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제4차 개헌에서 규정하였던 소급입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군사정부 역시 소급 적용을 통해 소위 ‘반혁명,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소급 입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제출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당의 창당과 정치활동에 대해 법적으로 어떠한 규정이 필요한가의 문제는 1958년의 진보당 사건 이후 정치권 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사안이었다. 진보당은 1959년 대법원 판결에 의하여 해체되었는데, 3차 개헌에서는 정당 조직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루어졌다. 정당의 조직은 자유롭게 하되, 이후의 활동이 헌법 정신에 맞지 않을 경우 이를 헌법재판소에서 다루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 시기를 통해 소위 ‘혁신정당’의 활동이 사회 혼란을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당의 창당과 활동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국회와 관련해서는 단원제와 양원제에 대해 모두 장단점이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박정희 의장의 8.12 성명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핵심적 쟁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선거구를 소선거구로 할 것인지, 중대선거구로 할 것인지였고, 비례대표 제도를 도입하고자 한 것이었다. 비례대표는 지역구가 아닌 정당의 득표율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표를 줄일 수 있고, 지역 대표가 아닌 직능 대표를 국회에 진출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제기되었다. 반면 비례대표 제도를 통해 작은 득표를 한 정당도 비례대표를 국회에 진출시킴으로써 너무 많은 정당이 국회 안에서 활동하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국회의원의 부정부패와 비효율적 활동을 막기 위한 것인데, 동일 선거구에서 2회 이상 당선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이 제출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정부의 구성과 관련하여 대통령 중심제로 간다는 것이 이미 8.12 성명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부통령을 둘 것인가의 문제와 대통령의 임기와 권한, 그리고 헌법상 독립기관을 어느 범위에서 둘 것인가의 문제였다. 주목되는 점은 이승만 정부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다른 정당에서 선출되었고, 대통령 부재 시 승계가 문제되었던 점이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대통령과 부통령을 같은 정당에서 나오도록 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원과 관련하여서는 사법부의 독립과 헌법재판소를 별도로 둘 것인가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사법부의 독립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법관의 임기를 종신제로 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이미 1947년 미군정에서 택하려고 했던 제도이다.9) 논의에서는 10년의 임기제를 도입하고자 하는 의견이 우세했던 것으로 보이며, 독립적인 기구로서 헌법재판소 설치에도 부정적 의견이 강했다. 결국 3차 개헌에서 설치가 규정되었던 헌법재판소는 다시 헌법 조항으로부터 삭제되었다.

     지방자치와 관련하여서는 3차 개헌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내용이 헌법 내에 삽입되었지만, 5차 개헌 과정에서 이 부분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도출되었으며 임명제로의 전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아울러 기초 자치단체로서 읍, 면이 제외되고, 지방자치 문제 자체가 헌법 내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삽입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방자치와 관련해서는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중앙집권성이 더 강조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경제조항을 따로 두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가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개헌에서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을 대폭 수정한 이후에는 더 이상 경제관련 조항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1962년의 개헌 논의에서는 경제개발계획에 관련된 내용이 삽입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과 경제정책 관련 심의기관에 관한 조항이 5차 개헌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논의과정에서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에서 삭제하는 것으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공정선거를 보장하기 위해 헌법에 명시되어야 하는 사항에 대한 논의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의 삭제는 사법부의 이해관계 및 대통령의 권한 강화와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없었던 헌법개정 절차에 국민투표를 삽입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국회가 아닌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서 개헌안이 마련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헌 국민투표에 대해 여론은 심각한 비판을 제기하였다. 박정희 의장은 5.16 1주년 기념사에서 국민의 뜻으로 개헌을 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는 국민투표로 개헌을 하겠다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10) 『동아일보』는 7월28일자 사설로 “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라고 비판하였다.

      제5차 개헌에서 포함된 개헌 시 국민투표를 거치게 한 절차는 이후 1969년 3선 개헌, 1972년의 유신헌법, 1980년 신군부에 의한 헌법이 여당 단독에 의해 국회를 통과하거나 국회를 거치지 않고 위헌적으로 통과될 때에도 각각의 헌법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대통령의 무제한 중임을 위한 개헌을 금지한다든지, 계엄선포 중 개헌을 금지하는 조항은 제5차 개헌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헌법을 개정으로 할 것이냐, 제정으로 할 것이냐의 문제는 문건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5차 개헌이 헌법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문건의 ‘11. 경과규정의 내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해설 B에서는 국회에서 헌법 개정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정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반면, ‘C’를 보면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헌법보다 더 우월한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개헌으로 국회양원의 재적2/3가 최고회의 재적 2/3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하면서 개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군사정부 하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행정뿐만 아니라 입법과 사법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고, 결국 1962년의 헌법 논의는 ‘개정’으로 마무리짓게 되었다.

     군사정부는 헌법 개정과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면서 전국적으로 공청회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8월23일과 24일에는 서울에서 공청회를 가졌고,11) 27일에는 춘천, 대구, 대전, 전주에서 공청회를 개최하였다. 28일에는 청주, 부산, 제주에서, 29일에는 광주와 인천, 30일에는 마산과 목포에서 각각 공청회와 좌담회를 개최하였다.12) 닫기 ▲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과 개헌 논의의 마무리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과 개헌 논의의 마무리

 개헌심의위원회와 전문위원회, 그리고 공청회와 좌담회가 전국적으로 개최된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다음의 문건과 같이 논의를 마무리 지었다.13)

제78회 국무회의 - 헌법에 관한 의견종합보고(안)
  • 헌법에 관한 의견종합보고(안) (제78회)

      전체적으로 보면 법무부가 올렸던 심의사항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난 결정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고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며, 경제조항을 넣도록 한다는 것이 법무부 심의사항과는 변화가 있었던 내용으로 보인다.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과 개헌 논의의 마무리

비례대표제도는 처음으로 도입되는 만큼 이에 대해 설명하는 또 다른 문건도 주목된다.

헌법에 관한 의견종합보고(안)
  • 헌법에 관한 의견종합보고(안) (제78회)

      비례대표의 도입은 사표를 줄이고, 직능대표를 비롯한 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인데, 위의 설명에는 다수파가 과반수의 득표를 얻으면 2/3의 의석을 배정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는 이탈리아, 5% 이하의 득표를 한 당에는 비례배분을 제외한다는 서독의 사례를 강조했다는 것을 볼 때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지 못하도록 여당이 다수당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면서 동시에 소수 정당의 의회 진입을 어렵게 함으로써 보수 양당 구도를 이끌고 가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헌법 개정안은 이후 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약간의 수정을 거친다.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과 개헌 논의의 마무리

 이후 10월12일 전체회의에서 재심의가 이루어졌고, 10월27일 조문화가 완료되었다. 11월5일에는 최고회의 위원 23명의 발의로 개헌안을 발의, 공고하였고, 12월6일에는 국민투표를 공고하였다.

헌법 개정에 관한 지방계몽 유세계획
  • 대통령 유시 – 헌법개정 언급

     1962년 11월5일 제91회 각의에서 헌법개정의 제안을 공고하였다. 동년 12월5일자 제100회 각의록을 보면 개정된 헌법안의 국민투표를 앞두고 지방에서의 유세계획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주목되는 점은 지방에서의 홍보활동에 중앙정보부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과 개헌 논의의 마무리

 지방에서의 홍보를 거친 이후 1962년 12월17일 국민투표를 거쳐, 12월26일 제105회 각의를 통해 헌법개정의 건 공포를 원안대로 의결하였다. 국민투표 결과 총유권자의 85%인 10,672,262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그 중 78.6%인 7,910,562명이 찬성함으로써 국민투표를 통과하였다. 군사정부는 투표율과 찬성률이 높았다고 발표하였지만, 여론은 반대 토론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반대율이 높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4)

헌법 개정 공포
  •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과 개헌 논의의 마무리


     개정된 내용들은 전술한 바와 같은 헌법심의위원회와 전문위원회의 논의사항 및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권고사항을 대부분 수용하였다. 그 내용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65조에 있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사항인데, 직선제의 경우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일 때 국회에서 공개회의를 열어 다수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는 것과 66조에서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경우 2/3 이상의 출석과 2/3 이상의 찬성을 얻은 자를 대통령 당선자로 한다는 조항이다. 대통령 선출이라는 조항이 65조에서는 직선제, 66조에서는 간선제를 모두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도 강화되어 75조에서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에는 기본권이 제한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영장제도,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3차 개헌에서 절대적으로 보장한 기본권이 후퇴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유신헌법에서 긴급조치에 의해서 기본권이 제한되는 내용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보기 ▼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부칙 제2조에서 개정된 헌법으로 선출된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1967년 6월30일에 임기가 종료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4년 임기를 고려하면 1963년 중반 이전에 개헌을 완료하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미국 정부가 군사정부에게 요구하고 있었던 빠른 시일 내의 민정이양에 대한 표현이었고, 5.16 군사정변 직후에 선포한 혁명공약의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닫기 ▲

민정이양 번복과 개정헌법 공고의 연기

민정이양 번복과 개정헌법 공고의 연기

 개정헌법이 국민투표를 거쳐 1962년 12월26일 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3년 국가재건 최고회의는 갑자기 부칙 2조의 개정에 대한 방안을 내 놓았다.

개정 헌법의 개정에 관한 보고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과 개헌 논의의 마무리

 이는 박정희 의장이 1963년 내에 민정이양을 번복하면서 나온 사태였다. 박정희 의장은 1963년 3월16일 성명을 발표하여 민정이양을 연내에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고, 바로 당일 각의에서 부칙의 개정을 의결한 것이었다. 이 방안에 대하여 국내의 정치인들은 대거 반대의 뜻을 표하였고, 미국 정부 역시 군사정부의 이러한 방안에 대하여 강한 반대의 의사를 밝혔다. 미국 정부는 군사정부가 민정이양을 연기할 경우 한국에 대한 원조를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이와 관련된 박정희 의장에게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군사정부는 민정이양에 참여하기 위하여 1962년 말부터 민주공화당 창당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이러한 활동이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반발을 일으켰고, 군사정부 내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중심이 된 정치활동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박정희 의장은 민정이양을 번복했던 것이다. 이 시기 군사정부 내에서는 반혁명 사건이 일어나 5.16 군사정변의 주체세력 중 일부가 숙청되기도 하였고, 그 반대급부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15)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민정이양의 일정을 연기하는 박정희 의장의 선언이 있었지만, 군사정부는 국내 여론의 반발과 미국의 압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민정이양 연기를 취소하고, 계획된 대로 민정이양을 실시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군사정부는 1963년 7월27일 “개정헌법의 개정에 관한 건 안 제안의 철회 공고”를 냈고, 이로써 제5차 개헌이 마무리 되었다.

개정헌법의 개정에 관한 건안 제안의 철회
  • 참고자료
    참고문헌 (내용 펼쳐보기 ▼)

    1) 박태균, 「군사정부 시기 미국의 개입과 정치변동, 1961~1963」, 『박정희 시대 연구』, 백산서당, 2002 참조.
    2) 동아일보, 1961년 8월13일자
    3) 이석제, 「3공화국 개헌」, 『동아법학』 72, 2016, 329-363쪽 참조.
    4)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회의록”, 『헌법개정심의록』 제1집
    5) 9인 소위원회 회의록 제1차, 1962년 7월18일
    6) 9인 소위원회 회의록 제1차
    7) 9인 소위원회 제2차 1962년 7월19일
    8)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회의록 제2차, 1962년 7월24일
    9) 박태균, 「미군정이 만들려고 했던 한국의 공화체제」, 『역사비평』 127호, 2013 참조.
    10) 경향신문, 1961년 5월17일자
    11) 1962년 8월23일과 24일 시민회관에서 헌법심의회 서울공청회의 첫날에는 공술인 14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갈봉근, 고재욱, 김규민 대한상의 사무국장, 김동리, 김천경 재향군인회, 문인구 서울지검 부장검사, 백남억, 안용대 전 민의원, 김기범 연세대 교수, 박동규 중소기업은행장, 양병호 변호사, 농촌대표 이경하, 길영희, 중소기업 이구종 등이 참여하였고, 이 자리에서 갈봉근 교수는 이번 헌법 개정이 ‘개정’이 아니라 ‘제정’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둘째날에는 공술인으로 연세대 이극찬, 국민대 정인홍, 건국대 이방석, 서울고법판사 이병용, 한환진 변호사, 김기석 단대학장, 김두종 서울대 의대, 정문기 수협, 이항녕 경향신문 논설위원, 황신덕, 정충랑 제헌의원, 황호현, 이규철 노청위원장, 공법학계 한웅길, 농협 조효원 등이 참여했다.
    12) 경향신문, 1962년 12월6일자
    13) 개헌 과정에서 헌법학 교수 칼 뢰벤슈타인 박사 초빙 추진하였지만, 실제로는 파버드 대학 러퍼트 에머슨 교수와 뉴욕대 프란츠 교수를 초빙하여 헌법 초안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석제, 앞의 글, 329-363쪽 참조.
    14) 경향신문, 1962년 12월 18일자
    15) 박태균, 「군사정부 시기 미국의 개입과 정치변동, 1961∼1963」, 『박정희 시대 연구』, 백산서당, 20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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