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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록의 재발견

국무회의록의 재발견

「국무회의록」으로 보는 우리나라 개헌의 역사

  • 국무회의록으로 보는 우리나라 개헌의 역사

    우리나라의 헌법은 1948년에 제정된 이후 총 9차에 걸쳐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승만 정부 시기인 1952년과 1954년에 1차와 2차 개헌이 있었고,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시기에 각각 3차, 4차와 5차 개헌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9년과 1972년에 6차와 7차 개헌이 있었는데, 특히 1972년의 경우에는 유신체제의 출범과 함께 개헌이 이루어졌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으로 신군부의 집권이 본격화되면서 8차 개헌이 있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상징이 되는 9차 개헌이 이루어졌다. 더보기 ▼


제헌헌법
  • 제헌헌법

    이 문건은 1948년 《관보》 이후 가장 오래된 「제헌헌법」 필사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제헌헌법」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 필사본의 첫장 상단에는 ‘6.25 동란 및 기타 사유로 분실된 법령원부 등의 사본을 관보 등의 근거서류에 의하여 1963.8.15. 작성하였음’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필사본은 2005년 1월 27일 법제처로부터 국가기록원이 이관 받았다. 이후 2007년 11월 30일에 대통령기록관으로 관리전환이 이루어졌다. 더보기 ▼


    「제헌헌법」은 전문과 10장 103조로 구성되었으며 단원제 국회, 대통령중심제를 근간으로 국민의 기본권 등을 규정하였다. 1948년 7월 17일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 헌법 제1호」가 발효되었다. 닫기 ▲

1차 개헌

1952년 이전의 개헌 논의

1952년 이전의 개헌 논의

개헌을 위한 최초의 논의는 1949년과 1950년에 이루어졌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민주당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1949년과 1950년 이승만 대통령이 개각을 통해 한국민주당과 후신인 민주국민당 소속 인사들을 입각시킴으로써 최초의 개헌논의는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1950년 제2대 총선거를 앞두고 다시 한번 점화되었다.

국무회의에서 개헌 관련 언급
  • 국무회의에서 개헌 관련 언급

    1949년 1월 14일, 금요일 오후 2시 20분. 부통령실에서 제9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교통부 장관은 국회 측에서 정무차관제를 없애고 국회의원 임기를 4년으로 연장하자는 요청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개헌’ 관련 내용이 최초로 언급되었다는 점, 국회 측에서 먼저 개헌안을 제안했다는 점 등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교환 조건인 듯 하나 부당하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대통령 유시 - 국회 개헌논의 부적절
  • 대통령 유시 - 국회 개헌논의 부적절

    1949년 6월 10일, 금요일 오후 2시. 경무대에서 제57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개헌관련 내용은 대통령의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 중 마지막 부분에 한 줄 정도 언급되어 있는데, 국회의 개헌 논의는 ‘적합지 않음’이라고 유시하였다. 이 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개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대통령이승만박사 담화집》(1953)의 1949년 6월 14일자 연설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국회 헌법개정안 원안의결
  • 정부, 국회 헌법개정안 원안의결

    1949년 9월 20일, 오후 2시 부통령실에서 제84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국회의 헌법개정안을 법제처에서 보고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국회의원 임기를 2년에서 4년으로’ 하고, ‘1950년에 예정된 5월 선거를 실시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 안건에 대해 내무부장관이 대통령 재가가 필요하다고 제안하였고, 장시간 논의한 결과 원안대로 의결하여 국회로 송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참고로 내무, 공보, 법무, 교통, 총리, 문교장관의 개인의견이 추가 기재되어 있다.

정부, 국회 개헌안 발의절차에 대해 논의
  • 정부, 국회 개헌안 발의절차에 대해 논의

    1949년 9월 23일, 금요일 오후 2시 15분. 부통령실에서 제85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5월 선거를 중지하고, 국회의원 임기를 연장하는 개정안’을 정부에서 발의하지 말고, 국회가 제출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유시하였는데, 내무부와 교통부 장관은 동의하였으나 총무처장이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통령이 직접 재검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 개헌 논의가 내각책임제를 강화하는 방안으로 이루어졌다고 강조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 시기 개헌 논의가 내각책임제를 강화하는 방안으로 이루어졌다고 강조하였는데, 1949년 국무회의에서 논의된 개헌내용을 보면 국회의원의 2년 임기를 4년 임기로 바꾸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초대 국회의원에 한하여 2년 임기로 한 것을 4년으로 바꾸어 대통령과 임기를 같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이는데, 내각책임제로의 전환 문제보다 임기 연장에 관한 부분만이 국무회의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민주국민당 서상일 의원 등, 헌법개정에 관한 제안
  • 민주국민당 서상일 의원 등, 헌법개정에 관한 제안

    이 문건은 국무총리비서실에서 생산한 《국무회의부의안건(참고서류)》에 포함된 50건의 참고서류 중 42번째에 해당된다. 국무회의에 보고된 안건의 참고서류가 별도로 관리된 것으로 보인다. 보고일자 등의 정보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헌법 개정에 관한 제안〉 이라는 표지와 관련내용이 있다.
    이 문건에 의하면 민주국민당에서 제안한 내용은 국무총리에게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국무원을 구성하고 통솔할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제51조에서 대통령을 ‘행정권의 수반’이라고 하는 내용을 삭제하고, ‘국가의 수반’이라고 하는 내용으로 수정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행정권의 수반을 국무총리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보기 ▼

    제안된 개헌안은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총리가 중심이 되는 내각책임제로 바꾼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이를 위하여 국회의 해산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총선을 통해 구성된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선출하고 대통령은 선출된 국무총리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대통령에게는 국무총리를 지명할 권리가 없으며, 단지 선출된 인사를 임명하는 역할만 부여된 것이다. 국무원의 지명권 역시 국무총리에게 있으며, 국무총리의 의사에 반하는 국무위원은 국무총리가 해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국회의 개헌활동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닫기 ▲

대한민국 헌법 제출 이유서
  • 대한민국 헌법 제출 이유서

    이 문건은 1950년 2월 7일 《관보》에 고시된 국무원 공고문 인데, 국회에서 제안한 헌법개정 방안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개헌의 요점은 종래 대통령 중심제를 책임내각제로 하자는 것이고, 특별법원에 대하여 명확한 법적 근거 부여, 선거 연기권을 행정부에 부여하자는 것이다. 책임내각제의 필요성 6가지를 언급하였는데, ‘정부와 국회 간 알력은 쿠데타 등의 불상사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정부와 국회의 갈등은 국무위원의 임명과 운영에서 자주 발생되었는데, 대통령이 이들의 인사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였기 때문이었다. 개헌제안자들은 국무위원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한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내용이 개헌안에 포함되었다. 특별법원의 설치를 법률로 규정하고자 하였는데, 기존 반민특별법원 군법회의 같은 특별법원의 설치가 헌법상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보기 ▼

    이 개헌안의 주된 내용은 대통령을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하면서 실제 행정의 책임을 국무원의 장인 국무총리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이면서 대통령은 국회에서 뽑도록 하는 제도적 모순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이 문건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개헌이유를 제시하였다. 하나는 국무위원을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임명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으며, 이 경우 짧은 시기 안에 경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국무총리가 국방부장관을 겸임(이범석)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농림부장관(조봉암)과 상공부장관(임영신)이 짧은 시간 내에 교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러한 과정은 정부 내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민주당의 후신으로 야당이었던 민주국민당 사이의 갈등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지만 개헌제안자들은 시스템의 문제로 보면서 국무위원의 임명과 국무원의 운영과정에 대한 헌법의 개정을 주장한 것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이 핵심적인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무회의에서는 내각책임제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헌헌법」이 제정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내각책임제가 중심이었던 원안이 대통령 중심제로 수정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큰 관심은 내각책임제로의 행정부 개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당시의 《국무회의록》을 보면 국회의원 임기를 연장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논의가 집중되었다. 이는 세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인지, 내각책임제로의 개헌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다. 실제 야당의 이 개헌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닫기 ▲

  • 1952년 국회가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철회하기 위하여 일으킨 정치파동의 전사

     국회 측의 개헌안에 대하여 앞에서 살펴본 《국무회의록》에서는 5월 국회의원 선거연기, 국회의원의 임기 연장을 논의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반면에 국회는 내각책임제로의 행정부 개편을 주된 개헌 목적으로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민주국민당의 개헌안은 1950년 3월 14일 부결되었지만 정부와 정치권에 대통령중심제냐 내각책임제냐의 논쟁을 점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1949년과 1950년에 국회를 중심으로 논의된 개헌안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11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무마하기 위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선제적으로 제출하도록 하였고, 1952년 국회가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철회하기 위하여 일으킨 정치파동의 전사(前事)라는 의미를 갖는다.

1952년 1차 개헌(발췌개헌)

1952년 1차 개헌(발췌개헌)

 우리나라의 개정헌법 제1호는 ‘발췌개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52년 4월 17일 국회의원 123명이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5월 14일 행정부가 제출한 정・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서로 혼합된 절충형 개헌이라는 의미이다.

 이 ‘발췌개헌’에 대한 연구는 개헌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내용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개헌절차에 대한 위헌・위법적인 요소가 지적되고 있는데,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공고 절차와 기간을 거치지 않았고, 국회의 독회나 토론도 거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 정상적인 표결절차를 거치지 않고 기립에 의하여 가부를 결정하였다는 점 등이다.

 1952년 개헌에 대해서는 개헌안이 제출되는 과정과 개헌안의 내용을 당시 생산된 기록물인 《국무회의록》과 국가기록원 소장 문서를 통해 세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과정과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고, 학계에서도 이러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정헌법 제1호
  • 개정헌법 제1호

    이 문건은 법제처 법령원본에 포함되어 있으며 2005년 1월 27일 법제처로부터 국가기록원이 이관받은 후 대통령 재가문서로 관리하다가 2007년 11월 30일 대통령기록관으로 관리전환이 이루어졌다. 1952년 7월 7일 대통령 서명, 국무위원이 부서(副署)한 공포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개헌안은 통치구조에 관한 조항 수정만 이루어져서 21개 조항이 수정, 삭제, 증보된 것으로 설명된다. 중요한 개정내용은 국무위원과 각부 장관에 대한 임명을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결의권을 국회에 부여하여 정부 또는 각료가 불법행위를 자행하거나 부적임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불신임결의를 하도록 하여, 국회의 행정부 견제 권한을 인정하는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더보기 ▼


    주요 개정사항은 첫째, 대통령・부통령은 직접선거로 선출, 둘째, 국회를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구성, 셋째, 국회는 국무원에 대하여 불신임 결의를 할 수 있고, 넷째,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내용적으로 보면 국회가 행정부의 국무원(내각)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유지 또는 강화함으로써 국회의원들의 동의를 얻어냈다고 할 수 있다. 닫기 ▲

대통령 지시 – 헌법개정안 입안
  • 대통령 지시 – 헌법개정안 입안

    1950년 11월 7일 제119회 국무회의가 경무대관저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법제처에 헌법개정안을 입안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회의는 오후 3시 10분에 종료되었다.

  •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50년 11월에 개헌안을 입안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50년 11월에 개헌안을 입안하라고 지시한 이유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통해 추론이 가능하다. 우선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이북으로 북진이 시작되었고,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쪽의 국경 지역까지 진격한 상황이었다. 통일을 앞두고 새로운 헌법으로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1950년 5월 30일 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이 축소되면서 야당에 의하여 내각제 개헌안이 다시 대두될 수 있었고, 재선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5.30 선거 결과 무소속 후보가 126석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전체 의석의 60%에 해당한다. 이승만 대통령 지지자는 대한국민당 24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0명, 일민구락부 3명 등 총 37명이 당선되었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헌법 하에서 대통령 지지자는 전체 재적의원의 1/4도 되지 않았고, 재선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개헌 논의는 중공군의 참전과 1.4 후퇴로 진척되지 않다가 1951년 제108회 국무회의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사건으로 국회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더 이상 개헌 논의를 미루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였다.

대통령 유시 – 헌법 등 개정안 입안하라
  • 대통령 유시 – 헌법 등 개정안 입안하라

    1951년 10월 9일, 화요일 오전 9시 30분. 부산 대통령 임시관저에서 제108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접선거, 양원제 등에 관한 헌법 개정과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을 법제처와 법무부에서 협의하여 입안하도록 유시하였다.

‘헌법개정안 요령’ 국무회의 의결
  • ‘헌법개정안 요령’ 국무회의 의결

    1951년 10월 16일, 화요일 오전 9시 반과 오후 2시에 걸쳐 부산 대통령관저에서 제110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법제처는 ‘헌법개정안 요령’을 안건으로 상정하였고, 본 문건에는 ‘별지와 같이 의결하다’라는 기재만 있을 뿐이다. 1951년 국무총리비서실에서 생산한 《대통령령급정부개혁안철》과 《국무회의부의안철》에서 별지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대통령직선개헌안〉이라는 동일한 문건에 ‘헌법개정안 요령’이 각각 첨부되어 있다. 구체화된 정부 개헌방향은 정・부통령의 직선제, 국회 양원제 구성이다. 국회는 제1원과 제2원으로 구성하고, 양원제 중 제1원은 당시 존재했던 국회를 그대로 계승하고, 제2원은 제1원의 반수 정도로 구성하되, 양원 합동회의를 조직하여 대법원장과 국무총리의 임명뿐 아니라 행정부와 입법기구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법안, 제1원과 제2원 사이에서 의견이 다른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했다.

  • 정부의 기본방향이 정해진 후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에 속도를 내도록 주문

     정부의 기본방향이 정해진 후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에 속도를 내도록 주문하였다. ‘정부개헌안’은 1951년 11월 27일 제121회 국무회의에서 ‘원안 의결’되었고, 11월 30일 《관보》에 고시되었다.

대통령 유시 – 헌법개정 속히 추진하라
  • 대통령 유시 – 헌법개정 속히 추진하라

    1951년 11월 6일, 화요일 오전 9시 30분. 부산 대통령임시 관저에서 제115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5개의 유시(諭示)사항을 전달하였는데, 그중 현안으로 귀속재산 불하에 관한 우선권 폐지, 헌법 개정안, 문교재단의 귀속재산 우선권 폐지법안 등을 속히 제출하라고 하였다.

헌법개정안 국무회의 일부의결
  • 헌법개정안 국무회의 일부의결

    1951년 11월 20일, 화요일 오전 9시 반과 오후 3시 두 번에 걸처 제119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장소는 오전에 대통령 임시관저, 오후에 경상남도청 내 국무회의실이었다. 이날 법제처에서 ‘헌법개정의 제의에 관한 건’을 심의안건으로 상정하였는데, 탄핵재판소 구성 등 일부내용을 제외하고 원안 의결되었다.

정부개헌안 국무회의 의결
  • 정부개헌안 국무회의 의결

    1951년 11월 27일, 화요일 오전 9시 반, 부산 대통령임시관저에서 제121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법제처에서 상정한 ‘헌법개정의 제의에 관한 건’을 원안 의결 하였다.

정부개헌안 공고
  • 정부개헌안 공고

    1951년(단기 4283년) 11월 30일 《관보》 제562호에 국무위원 허정, 이순용, 변영태, 이기붕, 백두진, 조진만 등 13명이 발기한 「헌법개정제의」가 공고되었다. 국회는 상, 하 양원으로 구성하고,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하원의 의원은 임기 4년, 상원의 의원은 임기 6년으로 하고, 양원은 법률안, 예산안 의결권을 갖고,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민이 연명으로 동시에 직접 선출하도록 하였다. 부칙으로 이 헌법시행시의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1952년 7월 23일로 종료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정부개헌안은 1952년 1월 18 국회 제9차 본회의에서 부결되었다.

  • 정부 개헌안이 부결된 후 국회의원 추방과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민중대회가 개최되었고 과격시위로 변해갔다.

     정부 개헌안이 부결된 후 국회의원 추방과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민중대회가 개최되었고 과격시위로 변해갔다. 이에 국회는 국민에게 부결사유를 설명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민심조장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개헌안 부결 관련 민중 데모사건 보고
  • 개헌안 부결 관련 민중 데모사건 보고

    1952년 2월 19일 화요일 상호 9시 반, 경상남도청내 국무회의실에서 제14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법무부와 내무부에서 개헌안 부결에 따른 민중 데모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이 문건에는 안건명만 있고 구체적인 보고내용은 없다.

국회, 개헌안 부결 관련 국민에게 고하는 말씀
  • 국회, 개헌안 부결 관련 국민에게 고하는 말씀

    1952년 3월 10일에 국회는 지난 11월 30일 공고된 헌법개정안을 부결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당시 개헌은 우리나라의 긴급한 당면과제인 평화와 통일과 부흥을 실현하는데 도움 되지 않고, 국회 양원제는 국회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국정처리를 지연시키기 위한 술책으로, 대통령 직접 선거는 국민들을 권력에 이용하여 국민 상호간에 당파심을 일으켜 서로 반목 질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반대 143 대 찬성 19로 부결시켰다고 하였다.

  • 내각책임제 개헌안 제출을 위한 준비

     이후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안 제출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정부는 동원가능한 조직과 인력을 활용하여 국회안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법무부, 국회개헌안 보고
  • 법무부, 국회개헌안 보고

    1952년 4월 4일, 금요일 상호 9시 반, 임시중앙청내 국무회의실에서 제26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법무부에서 국회에서 초안 작성 중인 헌법개정안을 보고했다는 기록만 있고, 상세한 보고 내용은 없다.

대통령 유시 –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반드시 실시할 것
  • 대통령 유시 –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반드시 실시할 것

    1952년 4월 8일, 금요일 상호 9시 반, 부산 대통령임시관저에서 제27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기한 내에 실시하여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정부, 국회개헌안 대응방안 논의
  • 정부, 국회개헌안 대응방안 논의

    1952년 4월 11일, 금요일 상호 9시 반 경남도청 내 국무회의실에서 제28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법제처, 법무부에서 각각 국회개헌안에 대한 반박문을 보고하였고, 공보처는 외부 인사에게 국회 개헌안 반박 집필을 의뢰하여 신문 등에 발표하도록 하였다. 법제처와 법무부 반박문의 상세 내용은 없다. 다만, 정부의 대응논리는 1952년 4월 21일자 《경향신문》의 〈개헌안에 대해 이공보처장 담화발표〉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다.

정부, 국회개헌안 반박문 발표 결정
  • 정부, 국회개헌안 반박문 발표 결정

    1952년 4월 16일, 목요일 상호 9시 반, 경남도청내 국무회의실에서 제29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모든 출석자는 개헌안에 대한 국회 동향과 대책에 관하여 보고하였고, 법무부와 법제처의 반박문을 발표하기로 합의하였다.

  • 4월 16일 정부가 국회개헌안에 대한 반박문 발표를 결정

     4월 16일 정부가 국회개헌안에 대한 반박문 발표를 결정하자 다음날 4월 17일, 국회의장 신익희는 국회의 헌법 개정안을 제의하였다.

정부, 국회개헌안 접수
  • 정부, 국회개헌안 접수

    1952년 4월 18일 총무처장은 4월 17일 국회에서 제의된 ‘헌법개정안’을 접수 받고 법제처장과 대통령, 국무총리에게 안건을 회부하였다. 원본은 법제처로 넘기고, 문건에는 ‘헌법개정안’ 사본이 첨부되어 있다. 국회 개헌안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 하고 ‘국무총리가 행정부의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선출’하고, 대통령은 이를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대통령의 총리 인사권을 제한하였다. 또,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이 군대 지휘권을 장악’하도록 함으로써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규정되었다. 이 ‘국회 개헌안’은 5월 7일 국무원공고 제35호로 《관보(제651호)》에 고시되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개헌안 원칙을 다시 언급하면서 강경한 자세로 국회 개헌안에 대한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개헌안 원칙을 다시 언급하면서 강경한 자세로 국회 개헌안에 대한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대통령 유시 – 개헌은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로 한정
  • 대통령 유시 – 개헌은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로 한정

    1952년 5월 13일 화요일 상오 9시 반, 부산 대통령임시관저에서 제38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대통령은 정부제출 개헌안 원칙에 관한 내용을 유시하였다. 정부개헌 방향에 대하여 ‘대통령직선제와 상하 양원제에 국한’하고, ‘내각책임제, 국무위원 국회 인준 등에 대한 논의는 일체 차단’하도록 하였다.

  • 다음날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의 논의와 관계없이 자신의 신념

     다음날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의 논의와 관계없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국회통과 여부 자체에 크게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최종적으로 국무위원의 국회 인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고, 이는 「헌법개정제의」 공고 안에 반영되었다.

대통령 유시 – 국무위원 임명의 상원인준 협의 가능
  • 대통령 유시 – 국무위원 임명의 상원인준 협의 가능

    1952년 5월 14일 수요일 오전 9시 반, 부산 대통령임시관저에서 제39회 임시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와 상하 양원제가 개헌의 절대조건’임을 재차 강조하였으나, ‘국무위원 임명과 관련하여 상원의 인준은 국무회의에서 협의 결정할 수 있다’고 변경된 태도를 보여주었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국회 통과와 상관없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에 따라, 본 회의에서 법제처가 상정한 정부개헌안 원칙인 ‘대통령직선제, 상하 양원제, 대사(大使)와 공사(公使)의 상원 인준제’를 원안 의결하였다.

정부개헌안 공고
  • 정부개헌안 공고

    제39회 임시국무회의가 있었던 1952년 5월 14일, 국무총리 장택상은 ‘정부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헌법개정제의〉를 국무원 공고 제36호로 《관보(제654호)》에 공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대통령기록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헌법개정제의의 이유서 및 조문별 설명서〉가 주목된다. 그 내용을 보면, 양원제도의 창설은 국회의 경솔부당한 의결과 과오를 피할 수 있고, 정부와 국회의 충돌을 완화할 있다고 하였다. 법률안과 예산안 등은 하원에 먼저 제출하도록 하고, 대통령이 국무위원을 임명할 때 하원의 승인을 얻도록 하였으며, 대사와 공사는 상원의 승인을 받도록하여 국회의 권한은 강화하고 대통령의 임명권은 제한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상원은 2/3은 민선으로 하고 1/3은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는데, 대통령도 3권 분립주의 원칙에서 국회가 대통령을 선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직선제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국무위원의 하원 승인’ 부분은 〈이유서와 설명서〉 문건 뒤에 붙어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사항 중 ‘국무위원 및 대사 공사 임명은 상원의 승인을 요한다’라는 메모와 상이하여 주목할 만하다.

  • 정부의 제안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상원의 구성

     정부의 제안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상원의 구성이다. 당시의 국회를 계승하는 하원을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상원을 설치하고 상하원 합동회의를 구성하여 주요 사안들을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했다. 또, 상원은 전체 1/3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이들의 임기를 6년과 3년, 그리고 2년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1973년 조직된 유신정우회와 유사한 구성이었다. 유신정우회는 대통령이 임명한 국회의원들로 전체 의원 수의 1/3을 차지하였었다. 직선으로 선출되는 국회의원의 경우 여당과 야당이 50%씩 의석을 나눌 경우 각각 전체 의석의 1/3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의원이 나머지 1/3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도록 고안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전체 의석의 2/3 정도를 여당 또는 친정부 세력이 차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유신정우회의 존재로 1978년 선거에서 야당이 여당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얻었음에도 국회 내에서 여당이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1951년 이승만 정부가 제안하고 1952년 통과된 1차 개정 헌법의 경우 상원의 1/3을 대통령이 지명하면, 유신시대의 국회와 마찬가지로 상원은 자연스럽게 2/3가 대통령을 지지하는 의원들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될 경우 주요 법안을 심의, 의결할 가능성이 높은 상하원 합동회의는 자연스럽게 여당 또는 친정부 세력이 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즉, 하원에서 50대 50의 여야 구성이 이루어지고, 상하원합동회의에서 하원 2/3대 상원 1/3의 구성이 이루어지면, 상원의 2/3가 친정부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상하원 합동회의는 대통령과 정부를 지지하는 여당이 자연스럽게 다수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될 경우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여당의 의견이 통과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둘째로, 하원과 상원의 예산안 심의 등에 이견이 있을 경우,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심의를 해야 하는데, 이 경우 여당이 유리하기 때문에 국회 권한은 축소될 수밖에 없는 모양새였다.

    정부 개헌안은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국민투표 제도 도입’이 추가 검토되었지만, 이는 1954년 2차 개헌에 반영되었다.

대통령 유시 – 국민투표제도 도입
  • 대통령 유시 – 국민투표제도 도입

    1952년 6월 10일 화요일 오전 9시 30분, 부산 대통령임시관저에서 제48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개정안에 ‘중대 문제’에 대해서 민의(民意)를 청취해야겠다는 의지를 밝혔는데, 이는 국회 의결에 대신한 국민투표제도 도입을 의미하였다.

국회개헌화 선거
  • 국회개헌화 선거

    그리고, 1952년 7월 4일, 이 개헌안은 개헌제의(提議)를 공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찬반 기립투표’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정부, 헌법개정안 공포 의결
  • 정부, 헌법개정안 공포 의결

    1952년 7월 4일, 금요일 오전 9시 30분, 경남도청 내 국무회의실에서 제55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국회에서 통과한 원안대로 헌법개정안을 공포하기로 의결하였다.

정부, 헌법개정의 건 공포
  • 정부, 헌법개정의 건 공포

    1952년 7월 7일 ‘헌법개정의 건’이 《관보(제688호)》에 고시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대통령기록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차 개정헌법〉과 동일한 내용이다. 다만, 〈1차 개정헌법〉에는 국회 개헌안과 정부 개헌안이 모두 명기되어 있으며, 개정된 내용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주요 개정내용은 정부 개헌안에 있는 ‘상원과 하원이 각각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명명’되었고, ‘탄핵재판소의 설치가 새로 포함’되었다. 탄핵재판소는 부통령이 재판장이 되고 참의원 5인과 대법관 5인이 재판관이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참의원 1/3이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다면,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관 5인과 참의원(전체의원 중 1/3은 대통령이 임명) 대표 5인으로 구성하도록 하여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또, 정부안에서는 ‘국무위원의 임명시 하원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으나, 공포안에서는 ‘국무총리 임명시 국회의 승인’을 얻고,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면’하도록 하였으며, ‘민의원에 국무원 해산권’을 부여하였다.

  • 개헌의 내용은 국회의 권한

     개헌의 내용은 국회의 권한을 상당히 존중하는 내용이 포함된 듯 하나 실제로는 정・부통령의 직선제 선출을 통한 대통령의 권한 강화, 참의원 제도를 통해 입법부가 정부를 통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대통령 유시 – 개정헌법도 대통령중심제로 운용
  • 대통령 유시 – 개정헌법도 대통령중심제로 운용

    1952년 7월 8일, 화요일 오전 9시 30분, 부산 대통령임시관저에서 제57회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날은 개정헌법이 공포된 다음날인데,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안전을 위해 대통령중심의 강력한 행정부를 요구하였다.

  • ‘발췌개헌’으로 알려져 있는 1952년 개헌안은 국무총리 제도

     ‘발췌개헌’으로 알려져 있는 1952년 개헌안은 국무총리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과 민의원의 국무위원 불신임권 조항을 제외하고 정・부통령의 직선을 통한 선출, 참의원의 설치가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참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한 것은 대통령이 입법부의 권한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참의원은 조직되지 않았다.

     그 동안 1차 개헌이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와 국회의 내각책임제 요구가 서로 절충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회 측의 개헌안은 국무총리제도를 유지한 것 외에는 어떤 부분도 반영되지 않았다. 헌법개정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사항(1952년 제57회 국무회의)에서도 확인하였듯이 1952년 개헌안은 정부와 국회 개헌안 내에서 ‘발췌’된 개헌이 아니라 정부의 의지가 일방적으로 반영된 개헌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누가 언제부터 ‘발췌’개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당시 신문에서도 ‘발췌조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국회의 내각책임제와 관련된 주장이 포기되었다는 내용이 동시에 보도되고 있었다.2)



  • 참고자료
    참고문헌 (내용 펼쳐보기 ▼)

    1) 이혜영,〈제헌의회기 한민-민국당의 집권전략과 헌법 갈등〉《사학연구 124》, 2016, p.173-219.
    2) 〈이합집산이 무쌍한 국회 : 양개헌안 발췌조항〉 《경향신문》 (19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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