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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수출산업촉진위원회발회식, 1963

수출산업촉진위원회발회식,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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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산업단지는 외국인, 특히 재일교포들의 투자를 유치하여 국가 산업화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개발되었다. 당시 정부는 수출산업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정계와 재계가 긴밀히 연대할 협력창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963년 3월 '수출산업촉진위원회'를 발족시키는 한편, 이 기구를 앞세워 재일교포기업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이에 재일교포 실업인들은 모국 진출을 희망하면서 대정부 관계 등 행정적 뒷받침을 할 창구와 보세가공이 가능한 산업단지 조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정부는 1964년 6월 14일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 조성법」을 제정하였으며, 이 법에 근거하여 한국수출산업공단을 설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제1단지를 서울 구로동에 조성하였다.

1960년대 초 구로동 산업단지 예정지역은 논과 밭,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야산에는 미국 공군 탄약고가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서울 중심가 재개발 때 도심에서 이주한 난민촌이 있었을 뿐 원주민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곳으로, 토지가격도 평당 300원~800원 정도였다. 또한 영등포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1번 국도가 근접해 있고, 경부선 영등포역까지 5㎞에 불과하였으며, 용수공급을 위한 취수장을 건설할 수 있는 안양천과 도림천이 인접해 있었다. 부지의 확보가 용이하면서도, 교통접근성이 매우 양호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수출산업공업단지조성에 관한 건, 1964

수출산업공업단지조성에 관한 건,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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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산업공업단지(제6단지)지정, 1973

수출산업공업단지(제6단지)지정,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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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산업 공업단지 예정지 지정(제1회), 1965

수출산업 공업단지 예정지 지정(제1회),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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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 입주기업체현황 및 문제점, 1967

구로동 입주기업체현황 및 문제점,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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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산업 공업단지 제1단지는 총면적이 14만평으로 1964년 12월에 착공하여 1966년 2월에 완공하였다. 당시 기공식은 1965년 3월 12일 박정희 대통령과 각계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으며, 공업단지 예정지 지정은 1965년 4월에 이루어졌다. 즉 예정지 지정 이전에 이미 공사에 착공한 것인데, 이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구로공단항공촬영, 1976

구로공단항공촬영,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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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구로동 수출산업 공업단지 계획수립 당시 기업유치 목표는 30개 업체였다. 입주실적은 재일교포 기업이 1967년까지 22개 업체이고 수출전망이 밝은 국내 기업이 18개 업체였다. 그중 교포기업체 4개소와 국내 기업체 5개소는 도중에 입주를 포기하는 등 개발 초기에는 입주희망 기업체가 적었으나, 1967년 산업단지가 준공될 시점에 이르러서는 계획보다 입주희망자들이 많아졌다.

이 결과 한국수출공업단지는 계속 개발·확장되어 총면적 12만평의 제2단지와 총면적 36만평의 제3단지가 추가 지정되었으며 그 후 인천의 부평과 주안에 제4, 제5, 제6 단지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구로공단'으로 불리던 한국수출산업단지 1단지와 2단지 및 3단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 경공업의 대명사였다. 수많은 농촌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구로공단으로 모여들었으며, 기계와 어울려 땀 흘리는 그들의 모습과 명절에 고향을 찾아 단체로 귀향하는 모습은 우리나라 산업화시기를 대표하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한국수출산업단지는 서울시 금천구에 소재한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만 6,784 업체가 108, 791명을 고용하여 연간 5조 6천억원 이상의 생산액을 기록할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다. 인천부평의 경우 612개 업체, 종사자 10,855명, 생산액 1조 6천억원, 인천주안은 418개 업체, 10,015명, 2조 7천억원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