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부속기관·관측소

청진부청

청진부는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하여 지정된 전국 12개 부(府)의 하나이다. 부는 군(郡)과 달리 일본인 거류민단이 있거나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 선정되었다는 점에서 근대기의 신흥 도시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청진부의 청사에 관련된 3매의 도면이 소장되어 있다.

<표> 청진부청 소장 목록
명칭 연도 도면수
청진부청 1910-1945 3

최초의 청진부청은 1907년 12월에 개설된 청진이사청을 전용하였다고 한다. 통감부 시기인 1907년 12월에 개청한 청진이사청은 1907년의 한일신협약을 계기로 그 기능을 다하고 이듬해 12월 31일에 폐지되었다. 구 청진부청은 1910년에 바로 이 청진이사청을 전용한 것이다. 그러나 1928년 12월 4일 새벽에 화재가 일어나 청사 전체가 전소되고 보관된 서류도 모두 소실되는 큰 사고가 발생하였다. 청진부청은 즉시 인근의 '쏘비에트'연방 영사관에서 행정사무를 재개하는 동시에, 청진부 신암동(新岩洞)의 육군용지를 새로운 청사부지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결정에 따라, 신 청진부청은 1929년 7월에 기공하여 같은 해 11월에 준공하였다.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진부청 도면은 구청사가 전소되어 신청사를 계획하는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도판1]의 구 청진부청 청사의 배치도를 살펴보면, 장방형 대지의 좌측에 치우쳐 중정(中庭)을 가진 청사가 계획되어 있고 청사 주변에는 세 개의 창고(物置)가 조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 청진부청의 청사 평면도는 [도판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입구는 전면에 두 개, 좌측에 한 개가 설치되었는데, 전면 출입구는 내부 복도와 연결된 반면, 좌측의 출입구는 회의실로 직접 통하도록 계획되었다. 각 실들의 배치를 보면, 건물 전면에는 좌측으로부터 재무계, 중정, 서무계, 내무실이 배치되었고 중정 후면으로는 회의실과 부윤실을 두었다. 각 실들은 내부의 복도를 통해 출입하도록 하였으나, 회의실은 인접한 실을 통하거나 외부의 별도 출입구를 사용토록 한 점에서 다소 폐쇄적인 접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실내 창고와 숙직실, 소변실 등의 편의시설은 건물의 후면에 계획되었으며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 외에도, 전면 중앙의 서무계 우측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2층 또는 지하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도면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1929년에 새로운 부지에 계획된 새로운 청진부청 청사의 배치는 [도판3]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사로와 계단을 통해 진입되는 높고 가로로 긴 부지의 전면에 청사 건물이 배치되었다. 또한 청사의 좌우에는 지적창고와 창고가 병치되어 있다. 청사의 평면은 일제강점기 도청사·부청사의 평면유형 중의 하나인 凹자형 평면, 즉 후면양단에 돌출부가 형성되도록 계획되었는데, 후면에는 부속건물이 외부통로로 연결되었다. 반면에 2층은 一자형 평면으로 단순화하였다. 다만, 내부에는 각 실의 채광과 환기에 유리한 후면편복도가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상의 시설들의 면적은 청사 연면적 250평, 부속가 21평, 창고는 30평이었음이 도면에 기재되어 있다.

청사 건물 각 층의 구성을 보면, 1층에는 중앙 현관과 홀을 중심으로 좌측에 재무계, 우측에 서무계와 내무계가 배치되었고, 후면 부속가에는 변소, 탕비실, 숙직실 등의 편의시설이 계획되었다. 2층의 좌측에는 회의실과 부윤실(府尹室)이 있었고 우측에는 내무계 기술실과 물품창고가 배치되어 있다.

[참고도판]

  • 도판1. 청진부청사구배치도, 1929년 추정 상세보기
  • 도판2. 청진부청사구평면도, 1929년 추정 상세보기
  • 도판3. 청진부청사신축설계도, 1929년 추정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