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가 세워지거나 다스려지기 위해서는 국토, 국민, 주권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민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부가 결정한 사항을 알리기 위해서는 공용어가 필요하다. 이렇게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를 정하고 그 언어를 적을 문자를 만들거나 선택하는 일을 좁은 의미의 ‘언어정책’ 또는 ‘어문정책’이라고 한다. 넓은 의미로는 국어 순화처럼 언어를 다듬는 일, 표준어 정하기와 같은 지역어의 위상 조정하기, 국어교육과 같은 국어의 의무 교육 등 국가가 언어의 문제를 취급하는 모든 것이 언어정책에 속한다.
광복 이후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으로부터 촉발되어 전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낸 국어 순화, 그리고 공문서의 한글 전용 실시, 한글 맞춤법의 개정과 국어기본법의 제정에 이르기까지, 국어정책의 역사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업화와 함께 근대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뜻 있는 국민의 노력으로 숨 가쁜 드라마를 연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발전이 훈민정음 즉 ‘한글’에 크게 힘입은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한글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국어정책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각종 표기법의 마련과 정착을 위한 노력 즉 어문정책이라 할 수 있다. 어문정책을 중심으로 한글이 걸어온 길을 시기 구분하면, 크게 ‘한글 회복 및 정착기’(1945~1983년), ‘어문규범 태동 및 확산기’(1984~2004년), ‘국어정책 다변화기’(2005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45년부터 1948년 정부수립 이전까지의 우리말 회복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일본어의 잔재와 수 천 년 동안 사용해 온 한자어를 정리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했다. 이 시기에는 한글만 쓰기 운동, 한글 가로쓰기, 한글날 법정 공휴일화 등 ‘한글의 정착과 국어 정체성의 회복 노력’이 이루어졌다.
정부수립 이후 1983년에 이르는 한글 정착기에는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1948년) 대통령령으로 ‘한글전용연구위원회’가 구성되는(1968년) 등 정부가 앞장서 공문서를 한글 전용화함으로써 국민 일반에 우리 고유 문자인 한글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1976년 문교부에 ‘국어순화분과위원회’를 설치한 것도 한자어나 일본어투를 퇴출하여 한글이 더욱 더 활용되게 하려는 의도를 담은 정책이었다. 한편 1960년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한글 타자기도 한글 정착에 큰 몫을 하였는데, 1970년대에는 공직사회에 타자 경연대회가 열리는 등 이 시기에 한글이 정착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여건이 잘 형성되어 있었다.
1984년부터 2004년에 이르는 어문규범 태동 및 확산기에는 외래어 표기법을 고시(1986년)한 것을 비롯하여 한글 맞춤법의 개정ㆍ고시(1988년), 표준어 규정의 고시(1988년), 그리고 두 차례에 이르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개정(1984년, 2000년)과 그 전파 노력, 문어 및 격식 있는 구어의 세밀한 기준을 담은 『표준국어대사전』의 편찬(1999) 등이 이루어졌다.
2005년 이후로는 「국어기본법」(2005년)을 기반으로, 국외 한국어 보급, 공공기관 및 대중매체 언어의 공공성 향상, 국민의 국어능력 향상, 언어 소외계층에 대한 복지 시책 실시, 국어문화유산의 보전과 발전 등 국어 전반에 걸친 다변화된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기록에 의해 우리 민족이 문자 생활을 했다는 최초의 시기는 삼국시대이다. 이때는 한자를 그대로 빌려다가 중국어 어순대로 썼으며, 이런 관습은 지도층을 중심으로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한자에 우리말의 특성을 반영하여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한자의 음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 한자의 뜻을 사용하기도 하는 이른바 ‘차자(借字) 표기’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지명의 표기에서 “買忽一云水城”(매홀일운수성)이라는 예가 있는데 여기서 ‘매’와 ‘홀’은 각각 우리말의 소리이고, 그 뜻은 각각 ‘물’[水]과 ‘성’[城]이라는 것이다. 한편, 중국어 어순이 아니라 당시의 우리말 어순을 사용한 예도 있다. 이는 남의 문자인 한자를 쓰되 우리말답게 표현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어느 것이 음을 나타내고 어느 것이 뜻을 나타내는지 혼돈을 일으키는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한자를 이용한 새로운 표기 방식이 나타난다. 그것은 한 단어의 표기 방법을 하나로 통일하고, 중국어에 없는 어미나 조사를 정해진 한자로 표기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식은 세 가지가 있었는데, 향찰과 이두 그리고 구결이다.
한자나 각종 차자표기로는 우리말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당시의 발달된 언어학을 바탕으로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세종 28년, 1446년).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도 한문으로 되어 있었듯 당시의 공적인 문자는 한자였다. 그러나 조선 사회 일각에서는 훈민정음이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점차 퍼져서 구전되던 고려 가요나 시조, 가사, 소설 등이 언문으로 표기되었다.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양반이나 일반인이 사적인 편지를 보낼 때, 그리고 비석이나 제문에도 ‘언문’이 사용된 적이 있으며, 임금의 편지도 ‘언문’으로 작성된 예가 있다. 임금의 편지는 선조, 효종, 숙종, 정조의 편지가 대표적이다. 양반의 편지로는 송강 정철, 학봉 김성일, 우복 정경세,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창계 임영, 추사 김정희 등의 편지가 전해 내려온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언문’은 일상생활에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1894년은 갑오경장이라는 근대적 대개혁이 단행된 때이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은 한글을 공문서의 문자로 채택하였다(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450년 만에 공식적인 지위를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칙령 제1호에는 한문 번역 또는 국한문을 덧붙인다는 과도기적인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공문서의 문자가 한글로 전환되지 못하고 당시의 대세인 국한문으로 유지된 한계가 있었다.
이후 1896년 「독립신문」이 한글 전용과 최초의 띄어쓰기를 토대로 창간되자 한글 전용이냐 국한문 혼용이냐의 문제, 한글의 명칭이나 순서 그리고 자소 개폐 등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07년 설치된 ‘국문연구소’가 1909년까지 활동하며 한글 표기법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국문연구의정안’이라는 이름으로 제출하였는데, 국권 상실로 시행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일제는 강점 초기에 한글 표기법 문제를 다루어 1912년 4월 ‘보통학교언문철자법’을 공표하였다. 그 이후 맞춤법의 정교화는 원리의 채택 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조선어학회가 현대적인 이론을 반영하여 만든 ‘한글마춤법통일안’(1933)과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을 내놓았다. 조선어학회는 이를 활용하여 국어사전을 펴내려 하였다. 그러나 한글과 표준말 보급 운동이 독립 운동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1938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며 우리 말글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가하였고, 이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