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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제일주의의 후폭풍 대형 붕괴사고

돌이켜보면 지난 30여년에 걸친 경제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실로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질보다는 양을, 실질보다는 전시위주로 너무 성급하게 추진해온 측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너무 많은 분야에서 내실을 다지지 못했습니다. 이번 사건도 바로 내실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이런 유형의 사건, 사고가 터져 나올 수 있는 위협은 아직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러한 사건,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에 대비해야 할 책임이 이 시대에 주어졌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건이 재발할 수 없도록 충분한 안전 점검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부의 책임입니다. 정부는 이번 사건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에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후 김영삼 대통령 담화문 중

대국민담화 발표문 참고 이미지
대국민담화 발표문(1994)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우리나라는 정말 빨리 고도성장을 이룩한 국가이다. 일제 강점기 수탈과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경험하고도 우리나라는 세계인들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은 부지런히 일했고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때로 너무 빠른 성장과 이를 뒷받침 해온 성장제일주의로 내실을 다지지 못한 탓에 사회 곳곳에서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특히 건설부분에서 빨리 무언가를 완성해야 한다는 성급함은 대형붕괴라는 큰 사고로 나타났다.
1960-70년대 대형붕괴 사건의 대명사는 1970년 4월 8일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었다. 서울시 마포구 창천동에 위치했던 와우 아파트 15동이 지어진지 3개월 만에 너무나 허무하게도 폭삭 주저앉은 것이다.

와우아파트 붕괴현장 참고 이미지 와우아파트 붕괴현장 참고 이미지
와우아파트 붕괴현장(1970)
와우아파트 붕괴현장 참고 이미지
와우아파트 붕괴현장(1970)

60년대 경제개발은 도시화, 산업화를 급속도로 이루었고 그 와중에 서울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곳곳에 제대로 된 주거환경을 갖추지 못한 무허가 집단주거지가 나타나자 도시미관은 엉망이 되어 갔다. 서울시는 무허가 주택을 없애고 서민아파트를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야심차게 아파트 건설을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 아파트를 세워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조사와 고민없이 실행한 아파트 건설 사업은 계획한지 얼마되지 않아 와우아파트 붕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불러왔다.
직접적인 원인은 경험없고 부실한 건축업자와 유착한 관련 기관의 부정부패였다. 공사대금에서 뇌물을 바치다보니 공사는 자연히 부실공사가 되었다. 턱없이 부족한 공사비용, 짧은 공사기간,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독기관 공무원의 부실감사 등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졸속 행정과 부정부패의 결합으로 일어난 사고였다. 이 사고로 아파트에 거주하던 입주민 등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향후 아파트 건설에 대한 감시와 감독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90년대 대형사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성수대교붕괴사건은 성급한 성과주의와 관리부실이 낳은 비극이었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 48m가 붕괴하였다. 이 사고로 다리위에 있던 차량이 강물로 떨어져 출근하던 시민과 등교하던 학생 등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1979년 10월 16일 개통한 성수대교는 폭 19.4m, 길이 1,160.8m의 4차선 교량으로, 공사비 116억원을 들여 착공한 지 2년 6개월 만에 완공됐다. 기존 한강 다리와 달리 미관을 살리기 위해 처음으로 거버 트러스(Gerber Truss)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공법을 택했다. 신공법으로 만들어진 성수대교는 15년 만에 무너졌다. 직접적인 사고 원인은 부실시공 탓이었다. 검찰 조사 결과 설계도면과 다르게 플레이트가 시공되고 수직재의 용접불량이 확인되었으며, 강재 볼트 연결핀 등도 부실했다. 부실시공 뿐 아니라 관계 당국의 형식적인 안전점검, 관리 소홀도 사고의 원인이었다. 매년 4차례 하는 정기안전점검은 청소, 누수, 도장 상태 등을 눈으로 확인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구조적인 결함이나 문제를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이 사고로 김영삼 대통령이 대국민 특별담화문을 발표하였고, 사고 대책의 일환으로 1995년 4월 5일 「시설물 안전관리 특별법」을 제정해 안전관리 체계를 법제화 했다. 또 부실 설계 및 감리자에 대해 5년 이하 징역 또는 5천만원이하의 벌금으로 제재를 강화했다. 서울시교육청은 1995년 고교 배정 때 한강 다리를 건너 통학하지 않도록 강남․북 교차 배정을 금지하기도 했다. 성수대교는 이후 공사비 780억원을 들여 다시 만들어 1997년 7월 3일 차량 통행이 재개되었다.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참혹한 붕괴사건이 또 일어났다. 당시 최고급 백화점 알려진 서울시 서초동 소재 삼풍백화점이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2분경 순식간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고객이 많이 몰리는 저녁시간대였기 때문에 피해는 더 컸다.
삼풍백화점은 1989년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불과 6여년 만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1995년 4월, 붕괴사고가 일어나기 약 두 달 전부터 건물의 5층 남쪽 천장 근처에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화점측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사고당일 천정이 내려앉았지만 내점객을 대피시키지 않았다. 오후 5시 55분 붕괴가 시작되기 불과 몇 분전 비상벨을 울리고 고객을 대피시켰지만 때는 너무 늦어 건물 A동이 20초 만에 무너져 내렸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 스케치 참고 이미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 스케치 참고 이미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 스케치 참고 이미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 스케치(1995)

삼풍백화점의 붕괴도 여지없이 부실공사 때문이었다. 처음 설계 시에 대단지 상가로 설계되었던 것이 정밀한 구조 진단 없이 백화점으로 변경되었다. 기둥의 폭을 줄이는 등 실제 공사를 할 때는 공사비용을 착복하기 위해 자재를 줄였고, 4층까지만 설계를 했던 건물에 대해 무리하게 5층 식당 확장공사를 시행하였다. 그 후에도 무리한 확장공사가 수시로 진행되었다. 붕괴 조짐이 있었지만 백화점은 응급조치로 대응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설계·시공·유지관리의 부실에 따른 예고된 참사였다. 1년 전의 성수대교 붕괴사건과 함께 성과지상주의가 가져온 그림자였다. 이 붕괴사고가 큰 인명피해를 일으킨 데는 사고 당일 있었던 진동과 붕괴의 조짐에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던 경영진의 과오가 크기도 하였다. 사고에 대한 안이한 태도가 낳은 재앙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현장 순시 참고 이미지
삼풍백화점 붕괴현장 순시(1995)

이 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 501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으로, 6.25전쟁 이후 가장 큰 인적 피해였다. 재산 피해액은 2,700여 억으로 추정되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건물들에 대한 안전 평가가 실시되었고, 긴급구조구난체계의 문제점이 노출되어 119중앙구조대가 서울·부산·광주에 설치되었으며, 「재난안전법」이 제정되었다.

재난관리법 참고 이미지
재난관리법(1995)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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