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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원조를 되갚는 유일한 나라 원조공여국클럽

“이 나라가 재건되는 데는 최소 백년은 걸릴 것이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뒤,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장군이 한 말이다. 최소로 잡아서 백년이라면, 다시 일어서는데 적어도 1세기는 더 걸리거나 그 이상 걸려도 될까 말까 하다고 단언한 말이었다. 이 얼마나 절망적인 말인가. 뒤집어 말하자면 어쩌면 다시는 일어날 가망이 없는 나라라는 말로도 들린다. 그만큼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현실은 암담했고 처절했던 것이다.

전선 곳곳마다 사람의 백골이 나뒹굴고, 거리마다 전쟁 고아와 피난민은 득실거리고,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은 우선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집이든 도로든 다리든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으니 그런 말이 나옴직도 하다. 6.25전쟁의 참상,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우리나라의 형편은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논밭은 피폐하고 산이란 산은 쏟아진 포탄으로 모조리 벌거벗은 민둥산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나라도 아니고, 이들은 앞으로 무엇으로 먹고 살며 무엇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활발해지는 한국원조 썸네일 이미지
활발해지는 한국원조(1953)

비단 전쟁을 총지휘한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만의 견해는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나 6.25전쟁 당시의 우리나라를 본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절망’이란 말은 바로 그 무렵 우리나라를 위해 생겨난 고유명사처럼 여겨질 때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 그나마 그 한국이 살 길이 있다면 무엇일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원조를 간절히 요청하는 편지를 쓴 것만 봐도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오직 한 가지 남의 도움, 해외의 원조를 받는 것뿐이었다. 옥수수 가루, 탈색한 군복이나 내의, 6.25전쟁 때 들여와 일찍 맛을 본 적이 있는 드럼통에 든 탈지분유, 그리고 소위 잉여농산물이라고 부르는 그들이 먹다 남은 곡물들과 같은 구호물자에 의존해 겨우겨우 연명하며 그 고비를 넘겼다. 1945년부터 약 50년 간 우리나라가 지원받은 해외원조 규모는 대략 600억 달러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산업화가 시작된 1969년에는 무려 800억 원의 원조를 한꺼번에 받았다. 그때 우리나라 예산의 거의 4분의 1을 국제사회로부터 지원받은 셈이었다.

결국 한강의 기적은 그렇게 탄생했고, 해외원조가 우리나라의 경제기적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구세주였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나라는 불과 반세기 만에 무역규모 면에서 세계 8위에 올라섰고, 그 밑거름은 역시 해외원조였던 셈이다. 이 나라가 재건하려면 최소 백년은 걸릴 거라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600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받았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 13, 14위의 확실한 경제대국이 되었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원조공여국’으로 변모했다.

전 세계에서 남의 나라에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들을 원조(援助) 공여국클럽 즉 개발원조위원회(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 DAC)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남의 나라의 원조를 받다가 잘 살게 돼서 되갚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는 오직 대한민국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영원히 원조를 받기만 하거나 애당초 남의 원조를 받지 않고 계속 주기만 하는 나라들이다.

1995년! 광복이 되고나서 꼭 50년이 되는 이 해를 우리는 가슴 벅차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해가 세계은행이 지정하는 원조대상국에서 드디어 한국이 제외된 역사적인 해였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그동안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빚을 비로소 갚을 때가 왔다는 뜻이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세계 최초의 나라 대한민국! 말 그대로 원조를 받기만 하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공여(供與)국으로 전환한 세계 최초 그리고 유일한 나라! 도움을 받던 경험을 살려 남을 도우는 원조공여국의 새 모델을 만들었다고 전 세계는 축하를 보냈다. 그야말로 세계 원조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한국국제협력단 소개 썸네일 이미지
한국국제협력단 소개(1991)

우리나라가 파리에 있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심사를 거쳐 개발원조위원회(DAC)의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한 것이 2009년이었고, 그 다음해인 2010년 1월 1일부터 그 일원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DAC는 세계 원조의 90% 이상을 제공하는 이른바 ‘기부(寄附)국 클럽’ ‘공여(供與)국 클럽’으로 불리는 OECD 산하의 기구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이 공여국클럽에 가입하기 전부터 나름대로 원조를 통해 우리가 진 빚을 갚으려는 의도로 이미 여러 갈래로 활동을 진행했었다.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즉 공적(公的)개발원조라는 측면에서 공적기관이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과 사회복지를 돕는 ‘지구촌 나눔 운동’ 등을 해왔고, 여기에는 유상무상의 자금지원 뿐 아니라 기술협력까지 포함해서 우리의 소중한 개발도상국 경험으로 다른 나라를 도왔다.

한국국제협력단(가칭) 설립 추진 썸네일 이미지
한국국제협력단(가칭) 설립 추진(1990)

그러다가 1991년에는 무상원조 전담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탄생시켰다. KOICA는 맨 처음 네팔과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필리핀 4개국에 44명의 봉사단을 보내고 지원금액도 그리 크지 않아 그 시작은 미약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절대빈곤과 나라의 혼란 등 어려운 시절을 거쳐 온 소중한 경험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원조보다 의미가 컸다. 극빈국에 가장 시급한 것은 보건과 위생문제이다. 남미 볼리비아로 가서 깨끗한 물 공급을 위한 상수도시설을 만들어줬다. 이미 10여 년 전 다른 나라 원조단체가 시도했었지만 너무 어려워 포기했던 일을 우리가 해낸 것이다. 그 후로 우리는 극빈국의 상수도와 의료시설 확충에 특별히 주력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내외분 해외파견 청소년 봉사단 접견 악수 썸네일 이미지
노태우 대통령 내외분 해외파견 청소년
봉사단 접견 악수(1990)
쓰리랑카 쓰나미 피해 대한민국 청소년 자원봉사단 발대식 썸네일 이미지
쓰리랑카 쓰나미 피해 대한민국 청소년
자원봉사단 발대식(2005)
청소년 해외자원봉사단 기념촬영 썸네일 이미지
청소년 해외자원봉사단 기념촬영(2007)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한국형 공적개발원조의 핵심은 교육이었고, 우리의 살아있는 개발 노하우를 한국국제협력단이 설립한 우즈베키스탄의 직원훈련원 등에 기계, 전기, IT, 자동차 분야의 한국전문가들이 직접 가서 기술을 전수하는 일이다. 또 한국식 농촌근대화운동인 새마을운동을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 구석구석에까지 확산시키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의 원조는 공여국클럽 국가들의 중간 수준 정도이다. 앞으로 우리의 갈 길은 멀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받은 이상으로 되돌려 주리라 믿는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SBS CNBC, 「코리아리포트」, SBS CNBC, 2013.
  • 신동아, 『개항 100년 연표자료집』, 동아일보, 1976.
  • 최남진, 『명동야화』, 신원문화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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