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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과 쌀 생산량의 부족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보릿고개로 기아와 빈곤이 심각하였다. 전쟁 중인 1951년 국무회의에서는 절미운동을 실행하기 위해 각 가정에서 잡곡 혼식을 적극 장려할 것, 음식점은 3할 이상의 잡곡을 혼합하여 영업할 것, 여관업자는 3할 이상의 잡곡을 혼합하되 점심은 제공하지 말 것, 미곡을 원료로 하는 제과, 떡, 엿 제조를 금지할 것 등 8개 항목을 결의했다. 1956년에는 농림부, 내무부, 재무부 합의로 1년 동안 50만 석의 쌀 절약을 목표로 절미운동을 전개하였고, 혼분식으로 식생활을 변화시킬 것을 장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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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635호] 혼식, 분식 장려(1967)

나라가 정한 국민의 밥상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앉아 꽁당보리밥. 꿀보다도 더 맛좋은 꽁당보리밥. 보리밥 먹은 사람 신체 건강해’. 한때 유행하던 ‘혼분식의 노래’이다. 보리밥을 먹자는 주제를 담고 있던 ‘혼분식의 노래’가 전국의 학교에 울려 퍼진 것은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이다.

정부는 국민들의 배고픈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식량증산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으나 1960년대가 되어도 쌀 수급 사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1961년 기록적인 대홍수, 1962년 태풍 노라와 극심한 가뭄, 그리고 1963년 보리수확기에 내린 엄청난 비. 자연재해라고는 하지만 연이어 농사에 타격을 입자 1962년 쌀 한 가마 값이 5000원선까지 솟구쳤는데, 이는 전년도에 비해 400%나 상승한 가격이었다. 쌀이 없어서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나물로 멀건 죽을 끓여먹기도 했는데, 산나물 죽을 만들어 먹고 목숨을 잃기도 하는 등 식량이 부족해서 아무 것이나 잘못 먹었다가 탈이 나는 사건이 종종 신문에 언급됐다.

쌀은 부족했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산 밀가루는 넘쳐났다. 당시 미국의 주요 수출상품은 농산물이었고 미국은 잉여농산물이 넘쳐나자 수출 시장 개척을 위해 원조라는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미국산 밀을 주었다. 미국산 밀이 무상공급으로 이뤄지면서 대량의 밀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밥맛에 길들여져 온 국민들의 입맛을 금방 바꿀 수는 없었다. 정부에서는 부족한 쌀을 대신해 밀을 소비시키겠다는 의도 하에 정책적으로 밀 소비를 촉진시키는 분식장려와 더불어 부족한 쌀을 대신해 혼식을 장려하는 이른바 ‘혼분식 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보리혼식과 분식보급 및 접객업소의 식사판매제한조치 보리혼식과 분식보급 및 접객업소의 식사판매제한조치 보리혼식과 분식보급 및 접객업소의 식사판매제한조치
보리혼식과 분식보급 및 접객업소의 식사판매제한조치(1967)

이 시기 ‘혼분식 장려운동’을 전개한 곳은 ‘재건국민운동본부’ 산하 ‘식생활개선추진위원회’였다. ‘혼분식 장려운동’은 일제강점기 때 절미운동과는 다르게 식생활을 개선해 영양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특별한 목표를 정했다.

1962년 11월 정부에서 본격적인 ‘혼분식 장려운동’을 시작했다. 본래 장려라는 단어에는 강제성이 없으나, ‘혼분식 장려운동’의 경우 실제로는 강제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강제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였다. 1970년대 초기에는 학생들의 도시락에 30% 이상의 혼식이 되어 있지 않으면 도시락을 먹지 못하게 하였다.

분식장려운동은 오래 유지된 식습관을 변경해야 하는 것이니만큼 다양한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예컨대, 식탁을 책임지고 있는 주부들이 동원돼 밀가루 음식으로 식생활을 개선하자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1971년 8월 분식을 권장하기 위한 전국 주부 궐기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 참여한 주부들은 앞으로 쌀밥 편식을 지양해 각 가정에서는 밥에 15% 이상의 잡곡을 섞고 1주 3회 이상 분식을 하며 혼분식을 하지 않는 요식업체에서는 음식을 사먹지 않겠다는 결의를 했다. 극장에서는 영화시작에 앞서 분식을 장려하는 대한 뉴스가 방영됐고 각 신문사는 분식을 유도하는 기사들을 경쟁적으로 게재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도 식생활센터에 분식 상담소를 설치하고 분식에 대한 강습을 진행하는 한편 분식 활성화를 위해 아침 10시부터 저녁 4시까지 분식에 대한 각종 상담을 적극적으로 해주었다.

  • 보리혼식 및 분식장려 작문, 포스터
  • 보리혼식 및 분식장려 작문, 포스터
    당선자 상장 수여(1968)
  • 식생활개선을 위한 혼분식특별요리강습 1
  • 식생활개선을 위한 혼분식특별요리강습 1
    (1973)
  • 식생활개선을 위한 혼분식특별요리강습 2
  • 식생활개선을 위한 혼분식특별요리강습 2
    (1973)

당시 농수산부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혼분식의 날’, 일명 쌀을 먹지 않는다 해서 ‘무미일(無米日)’로 정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모든 음식점에서는 25% 이상의 보리쌀이나 면류를 섞어서 팔아야 했다. 오늘날 곰탕이나 설렁탕에 국수나 당면을 넣어 먹는 것은 이때부터 생겨났다. 이러한 조치로 한식을 파는 음식점들은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보리, 좁쌀, 콩 등의 잡곡을 섞어 지은 밥을 내놓자 손님들의 불평이 늘어났고 매상도 떨어졌다.

분식장려운동으로 혜택을 본 것은 ‘라면’이었다. 1963년 9월 15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라면이 등장했다. 라면에 대한 국민들의 초기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가격 면에서도 부담이었지만, 라면으로 한 끼 식사를 대신할 수 있다는 라면 회사의 선전 문구를 국민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운동이 계속될수록 밀가루로 만든 라면, 빵, 과자 등의 분식수요도 늘어났다. 1965년 연간 1인당 13.8kg에 불과했던 밀가루 소비량은 분식 장려 운동으로 1969년에는 28.7kg까지 증가했다.

전국 순회 식생활 개선 강습회, 혼식의 중요성 전국 순회 식생활 개선 강습회, 혼식의 중요성 전국 순회 식생활 개선 강습회, 혼식의 중요성 전국 순회 식생활 개선 강습회, 혼식의 중요성 전국 순회 식생활 개선 강습회, 혼식의 중요성
[대한뉴스 제916호] 전국 순회 식생활 개선 강습회, 혼식의 중요성(1973)

혼분식 관련 행정명령은 1976년까지 계속 시달되다가 1977년에야 해제되었다. 혼분식 관련 행정명령이 해제될 수 있었던 것은 쌀 수급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1971년 우리나라 육종학자들에 의해 생산량이 기존의 벼보다 30%가량 높은 통일벼가 개발되면서 쌀 생산이 급증했으며 1977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쌀 자급자족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쌀밥을 소원하던 국민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해였다.

식량 자급에 성공하면서 강압적인 ‘혼분식 장려운동’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강력한 운동의 전개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은 이미 밀가루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1980년대 들어 쌀 소비량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외식이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패스트푸드 등의 등장으로 쌀 소비 감소는 더욱 심화되었다. 1979년 135.6kg이었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16년 61.9kg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쌀 소비 촉진을 위해 떡이나 술, 과자 등 쌀 가공식품 개발도 있었으나 쌀 소비는 크게 늘지 않았다. 쌀이 부족해 혼식을 하고 분식을 강제로 했던 때와 쌀 소비 촉진 운동을 하는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집필자 : 황은주)

참고자료

  • 네이버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
  •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 『10대와 통하는 문화로 읽는 한국 현대사』, 철수와영희, 2014.
  • 부산일보, 「흰 쌀밥보다 잡곡」, 2015.8.18.
  • 한겨레21, 「쌀 먹으면 대뇌변질증?」, 200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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