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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가사집 『농가월령가』에 “북어 쾌 젓조기로 추석 명일 쉬어 보세”라고 읊은 내용이 있다. 여기서 ‘명일(名日)’은 오랜 관습에 따라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축일 즉, 명절(名節)을 말한다. 명절은 대개 보름마다 한 번씩 있는 절기(節氣)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계절에 따라 뜻깊은 날을 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명절은 음력 1월 1일 설날과 15일의 대보름, 4월의 한식과 초파일, 5월 단오, 6월 유두(流頭), 7월 백중(百中), 8월 추석, 11월 동지(冬至) 등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명절의 의미를 거의 상실한 10월의 말날(午日)과 강신일(降神日), 12월의 납향날(臘享日) 등이 있다. 우리 민족은 이런 여러 명절을 통해 전통을 지켜나갔으며 정서적 유대감을 함께 공유해 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명절들의 의미가 퇴색하였고 설날, 추석 등 몇몇 명절만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대한뉴스 제1154호] 추석 귀성객 인파, 성묘 및 임진각 망향제
[대한뉴스 제1154호] 추석 귀성객 인파, 성묘 및 임진각 망향제(1977)

우리 우리 설날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 첫 아침을 맞는 명절이다. 설과 관련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백제에서는 261년 설맞이 행사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651년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조원전에 나와 백관들의 새해 축하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새해를 맞기 전날에는 묵은세배를 하기도 하고 밤부터 새벽 사이에 파는 복조리를 사서 걸어두기도 했다. 남들보다 조리를 먼저 사야 복이 많다고 해 밤에 자다 말고 조리를 사기도 했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지만, 그 해의 행복을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뜻으로 조리를 마련했는데, 조리 안에 돈, 엿, 성냥을 등을 넣어 방 귀퉁이나 부엌에 매달아 두었다가 썼다. 또 그믐날 밤에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여 집 안 구석구석에 등불을 밝히고 밤을 새웠는데, 이를 수세(守歲)라고 한다.

설날 아침이 되면 설빔을 차려입고 차례를 지낸다. 설 차례에는 떡국을 올리고 차례를 지낸 다음에 음복을 하고 떡국을 먹는다. 차례와 성묘가 끝나면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하며 인사를 나눈다. 이때 서로 복을 나눠주는 덕담(德談)을 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세뱃돈을 준다. 설날의 놀이로는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이 있다.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 전후로 성묘를 하는 세시풍속은 오늘날에도 잘 전승되고 있지만, 민속놀이 등 몇 가지 세시풍속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직접 바느질해 설빔을 짓는 것은 옛 이야기가 되었고 복조리를 사는 일도, 체를 대문에 걸어놓아 야광귀가 촘촘한 구멍을 세다가 새벽을 맞아 물러간다는 풍습도 사라졌다. 덕담도 과거에는 ‘만수무강하십시오, 자손만대까지 부귀영화 누리십시오’ 등 사자성어를 포함한 내용이었다면 요즘은 상대방의 처지나 환경을 고려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덕담으로 축수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근래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등 유관기관에서 민속놀이를 재현하고 있고 이를 찾는 가족들도 날로 늘고 있다는 것이다. 떡국을 끓일 가래떡을 기계로 빼거나 상품으로 만들어진 것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떡국을 설 음식으로 하는 세시풍속은 잘 전승되고 있다.

설날을 찾아서

세배하는 모습 썸네일 이미지
세배하는 모습(1972)
서울역 구정 귀성객 썸네일 이미지
서울역 구정 귀성객(1977)
설날 민속놀이 널뛰기를 하는 시민들 썸네일 이미지
설날 민속놀이 널뛰기를 하는 시민들(1990)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도 억압했다. 우선 태양력에 맞게 양력설을 지내도록 했는데, 양력설은 새롭고 진취적이라며 신정(新正)으로 부르고, 원래 지내던 음력설은 오래되어 폐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구정(舊正)으로 불렀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양력설을 지내도록 밀어붙여 음력설을 지내는 조선인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아 탄압하였다. 설을 앞두고 고등계 형사들이 방앗간에 나가 영업을 하는지 감시하고 설빔을 입고 나온 조선 사람을 보면 옷에 먹물을 뿌렸다. 그러나 일본의 압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 국민들은 신정을 왜놈들이 정한 명절이라며 더욱 더 지키지 않게 되었다. 구정에 몰래 조상에게 술 한 잔 올리고 성묘를 하는 것을 식민지배에 항의하는 운동으로 여기기도 했다.

광복 후 자유당 정부는 신정을 유일한 설이자 휴무일로 지정해 설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심지어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종전에 쓰던 단기연호를 서력으로 바꾸면서 양력 1월 1일이 새해의 첫날로 굳어버렸다. 정부에서는 고향방문과 차례, 세배, 떡국 먹기부터 윷놀이에서 널뛰기까지 설날에 하던 모든 행사를 양력설에 맞춰 하도록 유도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음력설을 지내자, ‘허례허식, 이중과세를 하지말자’며 음력설 추방 캠페인까지 벌였다. 이중과세 이야기가 나온 것은 나라에서 양력설을 지내라고 하니 그날 간단히 지내고, 정작 제대로 된 명절인 음력설을 지내다 보니, 이중으로 차례상을 차리게 된다고 하여 이중과세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1월 1일부터 사흘은 휴무일로 정했지만 음력설에는 하루도 쉬지 못했다. 공무원은 물론 민간기업도 그 지침을 따라야 했다. 몰래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하는 사람이 생길까봐 그날에는 휴가나 출장도 보내지 말라고 공문으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가 아무리 신정을 강요해도 국민들은 여전히 음력설을 명절로 생각했다.

1981년의 조사에 따르면, 음력설을 지내는 국민이 전체의 81.8%나 되었다. 많은 수의 국민들이 음력설을 지내자 정부는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을 붙여 음력설 하루만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 동안 사용되었다. 1989년에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음력설을 설날로 개칭하고 전후 하루씩을 포함하여 총 3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비로소 음력설이 양력설과 동등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1991년부터 양력설 휴일을 사흘에서 이틀로, 1999년부터는 하루로 줄였다.

음력 과세방지에 관한 건
음력 과세방지에 관한 건(1954)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우리 명절은 달과 관련이 있는 것이 많다. 특히 달이 꽉 차는 만월에 축제가 많았는데, 음력 8월 15일은 일 년 중 가장 큰 만월을 이룰 때였다. 또 추석은 계절적으로 한 해 농사를 수확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풍년을 축하하고 조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지내는 큰 명절이었다. 추석의 다른 이름은 한가위, 가배일(嘉俳日), 중추절(仲秋節) 또는 중추가절이다.

추석날 아침에는 일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 햅쌀로 밥을 짓고 술을 빚으며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차례를 지낸다. 이렇게 햅쌀로 지은 송편을 ’오리송편‘이라 한다. 차례상에는 햇과일과 함께 토란탕 등이 올랐다. 차례를 지낸 뒤 음복을 하고 조상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는데, 한가위에 앞서 미리 갈아놓은 낫으로 벌초를 한다. 한가위 민속놀이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강강술래는 손에 손을 잡고 둥근 달 아래서 밤을 새워 돌면서 풍요를 기원하는 놀이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추석때 가족들 송편빚는 모습 썸네일 이미지
추석때 가족들 송편빚는 모습(1957)
추석 귀성객 모습 썸네일 이미지
추석 귀성객 모습(1972)
추석 귀성객 썸네일 이미지
추석 귀성객(1977)

명절 민족대이동

명절이 되면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경, 민족대이동이 이뤄진다. 도시화로 시골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 명절에 고향을 찾으면서 민족대이동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한때 민족대이동 대열에 우리나라 전 인구의 5분의 1이 참여했을 때도 있었다. 민족대이동의 시작은 귀경 차표 예매로 시작한다. 1976년 풍경을 보면, 추석 명절 전후 서울역에서 매표 전쟁이 한창이었다. 서울역 근처 여관이나 서울역 대합실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예매 대열에 섰다. 매표창구가 24개나 되었지만 새벽 4시부터 사람이 몰렸다. 오전 9시부터 차표 예매를 시작했는데 이미 서울역 앞 인파는 5천 명, 용산 방향으로 2백 여 미터나 줄을 이어 섰다. 경찰은 새치기를 막기 위해 예매객들을 바닥에 앉히고 일어서지 못하게 했으며 장대를 머리 위로 휘젓는가 하면 끼어드는 사람을 곤봉으로 치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질서도 잡히지 않았고 암표상이 극성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명절이면 여전히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근래에는 고향에 있는 어른들이 자녀들이 있는 곳으로 역귀성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집필자 : 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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