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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잊지 못할 추억의 시간

말 그대로 소풍(逍風)은 ‘바람을 쏘인다’는 뜻이다. 교육적으로는 초·중·고등학생들에게 봄, 가을에 산이나 들, 공원, 역사 유적지 등을 찾아 운동 및 자연관찰 등의 학습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사의 인솔 하에 하루를 보내는 교육활동이다. 소풍은 매일처럼 계속되는 학교수업을 떠나 심신의 피로도 풀고 기분 전환을 시도하면서 현장견학, 단체 활동을 통한 협동심과 지도력의 배양, 규칙의 준수 등 다양한 교육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김으로서 학생들에게 학창 시절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의미 있는 행사이다.

소풍가는 날
소풍가는 날(1993)

소풍의 역사

정규 교육과정 속에 근대적인 개념의 소풍이 포함된 것은 개화기 이후의 일이다. 개화기 이후 신교육이 도입되면서 심신의 단련을 중심으로 자연의 관찰이나 감상, 역사·문화 유적이나 시설 등의 견학을 위해 실시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을 ‘멀리 걸어서 간다’는 뜻을 담고 있는 원족(遠足)이라 칭하였다. 1927년 10월 동아일보 신문기사에 “원족(遠足)간다 하야 모양을 내기 위하야 의복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잘못임니다. 간단하게 하는 동시에 더러워질 생각을 하고 검소하게 차리는 것이 좃슴니다”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당시에는 하루면 갔다 올 수 있는 원족뿐만 아니라 며칠이 소용되는 수학여행도 있었다. 1920년대에는 각 학교의 수학여행이 신문에 일일이 보도되기도 했다. 고등보통학교의 상급생들은 수학여행 형식을 빌려 최고 인기 코스인 금강산을 찾았으며, 소학교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유적지를 원족으로 찾았다. 1960∼70년대의 소풍은 고전적인 형태로 실시되었다. 어머니가 마련해준 도시락을 들고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거리의 산이나 들, 또는 명승고적지를 교사의 인솔 하에 줄을 지어 걸어서 갔다 오는 것이었다. 보통 한 학년 학생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때문에 길은 길게 이어졌고 이로 인해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교통편을 이용하지 않고 하루에 걸어서 갔다 올 수 있는 범위에서 목적지를 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로 학생들이 몰려 혼잡을 이룰 때가 많았다. 1963년 4월 봄 소풍 때 서울 시내 국민교생 43만 명 중 6학년의 4만 명과 5학년의 7만 명은 당일치기로 시외로 나갔으나 나머지 32만 명의 저학년 어린이들은 시내에 흩어져 있는 명소나 고적지, 유원지를 찾다보니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비슷한 장소가 북적거리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당시 서울에서 소풍을 가장 많이 갔던 곳은 창경궁, 덕수궁, 우이동, 장충단공원, 남산공원 등이었다. 소풍 길에는 어머니들이 함께 가는 경우가 많아 더욱 붐볐다. 거기다 빠질 수 없는 장사치들도 있었다. 아이스케키, 풍선, 사이다, 솜사탕 장사들은 소풍이 있는 학교를 귀신 같이 알아내 소풍길 뒤를 따라다녔다.

창경원(창경궁)에 소풍나온 아이들 썸네일 이미지
창경원(창경궁)에 소풍나온 아이들(1972)
덕수궁에 소풍 온 어린이 썸네일 이미지
덕수궁에 소풍 온 어린이(1979)
동물원 관람을 하는 유아원생들과 지도교사들 썸네일 이미지
동물원 관람을 하는 유아원생들과
지도교사들(1985)

소풍은 그냥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 학습활동이라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자연을 관찰하면서 급우들과 오손도손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먼 거리를 걸었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반별 노래 및 장기자랑, 수건돌리기, 닭싸움, 씨름, 보물찾기, 공놀이 등을 진행하였다. 이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장기자랑과 보물찾기였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감춰두었던 다양한 재능을 펼쳐 보이며 학생들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고는 했다. 우스꽝스러운 분장으로 콩트를 하거나 숨겨놓은 악기 연주 실력에 노래 실력까지 뽐내는 친구들도 많았다. 보물찾기는 1970년대 말까지 소풍의 꽃이었다. 교사들이 미리 숨겨놓은 쪽지를 찾아 학생들은 바위도 들쳐보고, 낙엽도 파헤쳐 가며 보물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찾아내느라 혈안이 되었다. 누군가 먼저 '찾았다'는 소리가 들리면 환호성과 찾지 못한 아이들의 낙담의 한숨이 교차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풍은 몇몇 문제점이 나타났다. 걸어서 갈 수 있는 한정적인 목적지 때문에 학생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줄 수 있는 장소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고, 특히 초등학교의 경우에는 소풍에 따라오는 학부모들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중·고등학교에서는 소풍의 교육적인 의미보다 공부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노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어 생활지도상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교통문제가 복잡해지고 일반 관광객이 증가함에 따라 여러 가지 안전문제와 교통문제가 증가해 소풍에 적합한 목적지를 발견하기가 어렵게 되면서 학생들이 걸어서 가는 소풍은 점차 사라졌다. 대신 소풍의 목적지까지 차량을 이용하고, 목적지에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일정한 장소까지 차량을 이용하는 형태의 소풍이 보편화되어 갔다.

오늘날에는 교통의 발달과 함께 거리의 제한이 적어짐에 따라 레크리에이션이나 심신의 단련이라고 하는 성격보다도 소풍을 통한 현장학습이라는 기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 현장학습은 학교에서 학습할 수 없는 내용을 교외로 이끌어 사회생활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학습하는 기회를 갖게 하는 방법이다. 현장학습은 학교교육의 특별교육활동으로 정착되어, 교실에서 학습한 내용을 견학·조사·탐사·채집·관찰 등을 통해 경험학습하고 공중도덕과 협동생활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로서의 의의가 커진 것이다.

경제성장기를 거치며 학생들의 야외 활동은 소풍이라는 간단한 것에서 벗어나 현장학습으로 확대되었고 더욱 더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현장 체험학습도 그 하나다. 도농 간 교환학습이 허용된 1997년 한 해 동안 서울의 초등학생 2,876명이 농촌으로 체험학습을 떠났다. 도시생활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은 체험학습을 통해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는 2005년 주5일 수업이 도입된 후 더 다양한 활동으로 늘어났다. 갯벌 탐사를 비롯해 별자리 관찰, 해병대 체험, 배낭학교, 귀족체험 등 체험학습의 종류도 한층 다양해졌다.

수건돌리기 하는 학생들 썸네일 이미지
수건돌리기 하는 학생들(1991)
서울대공원에 소풍 온 어린이들 썸네일 이미지
서울대공원에 소풍 온 어린이들(1997)
남산에 소풍을 온 어린이들 썸네일 이미지
남산에 소풍을 온 어린이들(2000)

소풍에 빠질 수 없는 김밥과 음료수

소풍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밥이다. 초기의 김밥은 매우 단순한 형태의 주먹밥으로부터 참기름과 소금으로 양념한 밥에 시금치나 단무지 등을 같이 넣고 싸는 형태로 출발하였다. 그러다 계란지단, 어묵 등이 첨가되었고 1970년대에 들어서는 소시지, 오이, 참깨 등이 첨가된 아주 다양하면서도 각 가정의 개성이 살아있는 형태의 야외용 도시락으로 특화되어 소풍을 가면 의례 김밥을 싸오는 것이 대세였다.

1960∼70년대 소풍을 갈 때면 김밥처럼 꼭 빠지지 않는 음료가 있었다. 청량음료 사이다와 콜라였다. 봄철 소풍놀이 때가 되면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에 일부 업체는 수송이 어려울 정도로 현물이 달리기도 하고 청량음료의 가격도 오르곤 했다.

(집필자 : 황은주)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 서울대학교교육연구소, 『교육학용어사전』, 하우동설, 1995.
  • 경향신문, 「봄은 동심에 넘치고」, 1963.4.24.
  • 동아일보, 「소풍과 원족」, 1982.5.6.
  • 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소풍」, 20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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