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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과 끈기의 상징  모내기

예전엔 밥을 먹고 나면 마실 물을 밥공기에 담아 남은 밥알 한 톨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보릿고개를 거치면서 먹을 것이 귀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농사가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 알기 때문에 쌀 한 톨도 허투루 여길 수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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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122호] 모내기에 바쁜 농촌(1957)

모내기의 역사

우리나라는 못자리에서 기른 모를 본 논에 옮겨 심는 ‘모내기’를 통해 벼농사를 짓는다. 사실 모내기라는 게 참으로 신기한 농법이다. 대부분 작물은 그냥 씨를 땅에 심거나 뿌려서 거두는데 모내기는 벼를 다른 곳에 키운 뒤 옮겨 싣는 방식이니 말이다.

모내기는 고려말 이앙법(옮겨심기)이 도입된 후 급격하게 보급되었고 조선 중·후기로 오면 남부지방의 90% 이상이 이 방법으로 벼농사를 지었다. 그 이전에는 논에 물을 대고 논바닥을 고른 뒤 종자를 뿌리거나 밭 상태의 논을 고르고 종자를 뿌리는 직파재배법(直播栽培法)을 통해 대부분의 논농사가 이루어졌다. 지금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과 미국의 벼농사 지대에선 직파재배가 시행되고 있는데 우리가 직파재배법에서 모내기로 벼농사법을 바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어린 모가 좁은 면적의 못자리에서 생육되기 때문에 관리와 보호가 편리하단 점, 본 논에 물을 대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만큼 물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못자리 기간만큼은 본 논에 보리 등을 심을 수 있어 2모작이 가능하다는 점, 거기에 재배관리가 쉽기 때문에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높일 수 있다는 점도 주효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절, 모내기는 최고의 농사법이 아닐 수 없었다.

  • 구한말 모내기 모습(미상, CET0075231 (1-1)) 참고 이미지
  • 구한말 모내기 모습(미상)
  • 농촌모내기(1962, CET0041523(1-1)) 참고 이미지
  • 농촌모내기(1962)

모내기의 방식

탈곡한 벼를 ‘나락’이라 하는데, 4월 말이 되면 나락 씨를 물에 불려 못자리 준비를 한다. 그리고 못자리를 할 논을 정해 물을 가두고 못자리판을 장만한다. 동시에 논을 갈아엎는 ‘논갈이’가 시작된다. 경운기가 없던 시절에는 논에 물을 가두어 소로 논을 갈았다. 못자리 준비가 끝나면 씨를 모판에 뿌린다. 갈아놓은 논에 물을 대고, 논을 평평하게 고르는 작업인 ‘써레질’을 시작한다. 이때 젖은 논흙으로 논둑 정리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논에 고인 물이 빠져나가지 않고, 장마나 홍수 때 논둑이 터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논둑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다른 논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본격적인 모내기가 시작되는 6월의 강수량에 따라 농사 풍흉이 결정될 뿐만 아니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를 옮겨심기 위해 모판에서 모를 떼내는 작업을 하고, 쪄낸 어린 모는 짚을 이용해 한 다발씩 묶었다. 이렇게 묶어낸 모를 ‘모침’이라고 한다. ‘모침’은 못자리를 한 곳에서 모를 심어야 할 논으로 옮겨야 했는데, 요즘에는 기계로 모를 심고 모판도 경운기나 트럭으로 나르지만, 과거엔 모두 직접 옮겨 다니며 해야 했던 만큼 고된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농민들의 땀방울을 식히며 힘든 시간을 달래준 것이 ‘농요’였다. 지역마다 다양한 모내기 노동요가 존재했는데 봄에 못자리에서 자란 모를 쪄내면서 부르는 모찌는 소리, 찐 모를 1포기씩 심으면서 부르는 모내기노래, 김을 매면서 부르는 김매기소리 등 수십 종이다. 농요는 1985년 1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됐다.

  • 농촌모내기 기계화(1962, CET0043723 (2-1)) 참고 이미지
  • 농촌모내기 기계화(1962)
  • 모내기 수원(1968, CET0033128 (1-1)) 참고 이미지
  • 모내기 (수원)(1968)
  • 국무총리실 직원 모내기 일손돕기(1979, CET0043006 3-1)) 참고 이미지
  • 국무총리실 직원 모내기 일손돕기(1979)

국가의 큰 행사, 모내기

1950년대에, 모내기는 국가의 큰 행사였다. 국가가 장려하는 사업이었고, 모든 관심이 모내기의 진척상황에 집중됐다. 모든 신문이 모내기가 시작되는 6월부터 7월까지 전국의 모내기 진척 상황을 발 빠르게 전했다.

"지난 19일 현재로 농림부에 집계된 전국 모내기 진척 상황을 보면 순조로운 강우로 인하여 총 1,099,000여 정보 중의 58%에 해당하는 오십 오만 팔천여 보에 모내기를 끝냈다고 하는데 이런 진척 상황을 미루어 늦어도 7월 10일경 까지는 모내기가 완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5할을 돌파 전국 모내기 상황>, 《동아일보》, 1956.06.23.

"이렇게 모내기 상황이 순조로울 때도 있었지만, 기후 상황에 의해 모내기의 진행상황이 순탄치 않을 경우 곧바로 걱정 가득한 기사들이 쏟아졌다."

“가뭄으로 국내의 우울한 빛이 짙어가는 이때 계속되는 치안국 집계에 의하면 12일 현재 전국의 모내기 상황은 총 이앙면적 1백 111,833정보 중 300,598정보의 모내기를 끝냈다. 동 집계에 의하면 북쪽 지방은 양호한 반면 남쪽에는 이앙이 부진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남쪽은 지금부터 본격적인 모내기가 시작된다고 한다.”

<전국 모내기 부진>, 《경향일보》, 1957.06.15.

모내기가 더디게 이루어지면 농부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마련이었다. 이에 광복 후부터 1959년까지 6월 15일이면 권농일 기념식을 가지며 일손이 부족한 농촌의 모내기를 지원하는 행사가 펼쳐졌다. 권농일은 부족한 농촌의 모내기 일손을 돕기 위해 정부가 지정한 기념일이었다. 공무원부터 학생들, 도시의 유휴 인력들이 동원됐고, 군인의 참여가 가장 높았다.

이후 1960년부터는 닷새 이른 6월 10일에 권농일 기념식을 했고, 1973년에는 모내기 일손을 더 쉽게 지원하기 위해 기념식을 폐지하고 기념일 역시 6월 첫째 주 토요일로 바뀌었다. 그러다 1980년에는 농촌에 이앙기가 도입되면서 모내기 시기도 빨라졌다. 6월 초, 중반이던 모내기 시기가 5월 하순으로 당겨지면서 권농일 역시 1984년부터 5월 넷째 주 화요일로 앞당겨졌다. 지금은 농업진흥청과 몇몇 학교에서 권농의 정신을 이어가며 모내기 체험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인구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리는 상황에서 일손은 더 부족해졌지만, 이앙기는 콤바인, 트랙터와 함께 노동집약적 벼농사를 편리하게 바꿨다.

모내기 일손돕기 새마을 운동 추진계획(1982, BG0001202(37-1))
모내기 일손돕기 새마을 운동 추진계획(1982)

최근에는 농업용 드론까지 등장했다. 기존의 모를 키워 이앙기를 이용해 모내기를 하면 1ha당 1시간 이상 소요되지만 농업용 드론을 이용할 경우 30분 내외로 작업을 마칠 수 있다고 한다. 드론을 이용하면 육묘작업의 생략과 직파작업의 간소화 등으로 관행적인 이앙 모내기와 비교해 50% 이상 노동력 절감 효과를 준다고 한다. 고령화와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농가의 고민을 덜어주는 이야기 이기에 반가운 소리지만, 우리 민족과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모내기’의 모습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한국세시풍속사전 (http://folkency.nfm.go.kr)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 「한국의 벼농사는 얼마나 고된 일이었을까?」, 조선일보, 2015. 07. 24
  • 「첨단 드론으로 벼 키우는 시대 앞당긴다」 충청남도 농업기술원 보도자료, 2017
  • 「드론으로 ‘최첨단 농업’ 날개 편다」, 충청남도 농업기술원 보도자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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