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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사의 성실한 기록자 대한뉴스

오늘날 영화관에서는 대체로 상업광고나 다음 영화의 예고편이 나온 뒤, 본 영화를 상영한다. 그러나 불과 20년전인 1994년까지만 하여도 영화를 보기 전의 풍속도는 사뭇 달랐다.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 극장 안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관객은 일어나 국민의례를 하였고, ‘대한뉴스’를 반드시 관람해야 했다. 이 대한뉴스는 TV가 집집마다 보급되기 전, 나라의 소식을 국민들에게 알려주고 국정을 홍보하기 위해 방영한 영상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대한뉴스는 국정을 홍보하는 영상물이기는 했지만, 광복이후 대한민국사를 2,040회에 걸쳐 꼼꼼히 기록한 영상자료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대한뉴스의 변천사

대한뉴스는 1945년 10월부터 미군정청에서 제작, 공개하였던 “조선시보”를 그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보”는 광복을 맞아 환호하는 군중의 모습과 미군의 도착,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는 모습 등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영상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시보”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 11월 4일에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가 발족되어 그 산하에 들어가면서 “대한전진보”로 개명되었는데, 흑백필름으로 월 1회 제작되었다. “대한전진보”는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작이 중단되었다.
뉴스 제작은 피난정부가 있던 부산에서 1952년 1월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다시 제목을 고쳐 “대한 뉴-스”라고 하였는데, 16mm 필름으로 월 2-3회 정도 부정기적으로 제작되었다. “대한 뉴-스”는 이동영사반이 지방을 돌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상영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시기 제작된 1호부터 21호까지의 원판은 서울 환도 과정에서 분실되고 말았다.

대한뉴스 보급에 관한 건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보급에 관한 건(1951)
대한뉴스 제14호 제15보 제작에 관한 건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제14호 제15보 제작에 관한 건(1952)

“대한뉴-스”는 1954년 11월 제48호부터 “대한늬우스”로 개명하여 매달 1편 씩 제작되었다. 1960년에는 외래어의 한글표기법 변화로 “대한뉴우스”로 제목을 변경하였고 재일동포용 뉴스 “한국소식”을 월 1편 제작 배포하였다.

제헌절 5주년 경축 참고 이미지
제헌절 5주년 경축(1953)
경무대 소식 참고 이미지
경무대 소식(1955)

이보다 앞서 1957년에 공보실 선전국 영화과는 미국원조재단의 지원으로 200여 평의 영화제작소 건물을 건립하고 미국 시라큐스대학의 영화기술제작단의 자문을 받아 영화제작기술의 향상을 꾀하였다. 거기에 흑백영사기 및 인화기를 각 2대씩 도입하면서 필름인화의 자동화를 이루어 더 많은 필름을 찍어 낼 수가 있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1958년부터 대한뉴스는 35mm 표준 필름을 사용해 주당 1편씩 제작하게 되었다. 필름 프린트 또한 120벌 가량 인화하여 전국에 배포되었다. 대한뉴스 제작기관도 1961년 6월 공보부 산하의 국립영화제작소로 승격하였으며 이후 1991년까지 이곳에서 대한뉴스 뿐만 아니라 각종 국정 홍보영화나 문화영화 등이 제작되었다.
“대한뉴우스”는 1972년부터 천연색으로 제작되기 시작했고 1978년 다시 한번 외래어 표기법의 변화로 “대한뉴스”로 개명되었다. 대한뉴스는 1980년 3월 그 명칭을 “시네마순보”로 바꾸고 15일에 한번 씩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불과 3개월 후인 5월에 다시 옛 명칭인 “대한뉴스”를 되찾고 주간 단위로 제작되어 1994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한뉴스 및 문화영화통합 제작배포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및 문화영화통합 제작배포
(1980)
대한뉴스개편창간호제작관련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개편창간호제작관련(1980)
아름다운 우리 강산 참고 이미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1980)

이렇게 주 단위로 쉼 없이 만들어진 대한뉴스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공개되었을까? 1952년 6.25전쟁 중에는 각 도의 공보과에 대한뉴스 필름프린트를 몇 부씩 보내 적당한 광장 또는 주요 영화관에서 무료로 상영하게 하였다. 1959년 4월부터는 공보실에서 매달 두 번 ‘영화의 날’을 마련해 대한뉴스 2편과 정부에서 만든 문화영화, 기록영화 등을 묶어 상영했는데, 서울의 경우는 시공관에서 무료로 연속 상영했다. 오락거리가 거의 없던 시절인데다 무료관람이었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이 대한뉴스는 1963년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애국심 고취와 계몽이라는 취지하에 애국가, 문화영화와 함께 극장 동시상영이 의무화 되었다. 그 후, 1994년까지 대한뉴스는 본 영화를 보기 전에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이 되어 사람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현대사를 기록한 대한뉴스

광복시기부터 만들어져온 대한뉴스는 1950~60년대 변변한 영상 매체가 없던 시절에 나라의 소식을 전하는 유일한 영상 뉴스로 의미가 있었고 인기도 높았다. 대한뉴스는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만큼 정부 정책이나 권력자의 홍보에 치중하는 면이 있었지만, 한국 현대사의 주요한 맥락을 매주 기록해 나갔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대한뉴스는 광복직후의 환희부터 6.25전쟁의 참상, 4.19와 5.16, 베트남전 참전, 남북회담, 수출신장, 10.26, 12.12 사태, ‘88올림픽 등의 정치․경제적 상황 뿐 아니라 각 지방의 특산물, 문화행사 등을 수록하는 등 1945년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 현대의 정치․경제․문화․생활사를 속속들이 영상으로 남겼다.
1970년대 각 가정마다 TV를 가지게 되면서 대한뉴스의 인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매일 새로운 뉴스를 가정에서 손쉽게 접하는 상황에서 주 단위로 만들어져 이미 뉴스도 되지 않을 소식을 극장에서 억지로 보는 일은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내용도 당시 정권의 정책홍보 일색이라 이를 접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거부감도 있었다. 대한뉴스는 1994년 12월 31일 2,040회를 끝으로 제작을 중단하였다.

대한뉴스 그 발자취1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그 발자취1(1994)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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