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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버스안내양은 1920년대 후반 처음 등장했다. 당시 시청버스였던 ‘서울부영(府營) 버스’에 처음으로 버스안내양이 등장했다. 여차장이라고 부르던 그때 ‘버스걸’이라는 명칭도 등장하는데, 1928년 4월 22일 서울시청에서 운행하던 정식 시내버스 등장소식과 함께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일본에 주문하였던 버스 10대도 도착하였고 버스걸과 운전자의 채용도 전부 완료하였으므로, 봄날의 꽃빛이 아주 무르녹는 오는 4월 22일 아침부터 영업을 개시하기로 되었다” 당시에 버스걸들은 매우 진취적이고 신식교육을 받은 처녀들이었다고 한다. 양장차림의 유니폼을 입고, 앞에는 차표 가방을 맨 채 승객들에게 표를 끓어주면서 살짝 미소를 짓는 버스걸의 인기는 금세 하늘로 치솟았다. 최고의 지성인으로 자부하던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버스걸은 신부 후보감으로 첫손에 꼽혔다고 한다. 운전기사가 최고의 신랑감 후보이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 일이다. 1930년 서울의 버스안내양 숫자는 48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일제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버스안내양은 광복이 되고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남자 차장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에게서 친절한 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었다. 1959년 2월 24일 「조선일보」는 “24일 교통부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오는 4월 초하루부터 서울 시내를 운행하는 600대 가까운 시내버스의 차장을 모조리 여차장으로 바꾼다”고 보도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남자 차장들에 의하여 가끔 발생되는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대한뉴스 제1179호] 시내버스운전기사, 안내원들 새마음갖기 전진 대회
[대한뉴스 제1179호] 시내버스운전기사, 안내원들 새마음갖기 전진 대회(1977)

대통령이 ‘버스안내양’의 처우개선 지시

1961년 버스안내양 제도가 재도입되었다. 버스안내양의 대부분은 지방에서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온 누이들이었다. 고향 가족의 생계까지도 책임지던 씩씩한 아가씨들이었다. 버스는 대부분 발 디딜 틈 없이 만원이었다. 작은 체구로 손님들을 버스 속으로 야무지게 밀어 넣고, 정작 자신들은 버스 출입구 손잡이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가기도 했다. 똑같은 직업인데도 시대가 변하면서 1920년대의 버스안내양과는 처우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당시 버스안내양들을 차장이라 불렀다. 저임금에 하루 18시간 가까운 노동도 벅찬데 욕설을 퍼붓는 취객, 짓궂은 손장난을 하는 승객, 아이의 차비를 내지 않으려는 엄마, 회수권 열 장을 교묘하게 잘라 열한 장으로 만든 학생들……. 수많은 ‘불량’ 승객들과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신문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안내양들의 열악한 대우에 대한 기사가 나오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9월 22일 서울시에 ‘여차장들의 생활시설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서울시는 한 달이 안 돼 '버스 안내원 후생시설 개선대책'을 부랴부랴 내놓았는데 숙소·휴게실·교양실·운동시설·위생시설 등 5가지 시설을 기준으로 버스회사의 등급을 매겨 시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업체는 ‘면허취소 등 본보기로 강경 조치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외에도 주당 근무시간은 48시간, 좌석버스 근무자의 경우 하루 일하면 하루 쉴 수 있었고 시내버스 근무자는 이틀 일하면 하루 쉴 수 있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서울시가 제시한 모범 기준일 뿐 현장의 근무 여건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숙소에 완전보일러설치가 된 몇 안 되는 버스회사가 모범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고속버스 안내요원 썸네일 이미지
고속버스 안내요원(1973)
시내버스안내양 썸네일 이미지
시내버스안내양 기숙사 여가 활동(1978)
버스안내양 후생 복지 썸네일 이미지
버스안내양 후생 복지(1978)

평균연령 18세, ‘가슴 짠한 우리들의 누이’

버스안내양이 유행가의 주인공인 노래가 나왔다. 가수 윤항기의 아버지인 윤부길이 작사하고, 한복남이 1956년 작곡한 <시골뻐스 여차장>인데, 심연옥이 불렀던 경쾌한 이 노래에 나오는 버스안내양은 명랑하기 그지없다. 차문을 탁탁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안내양은 1960∼70년대 보릿고개 시절 동생들의 학비나 집안 살림을 돕던 여공(여성공장직공)과 함께 상경 처녀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다. 어떤 직업이든 애환이 있기 마련이지만, 유독 눈물겨운 사연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영화나 책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했다. 이청준의 『살아있는 늪』, 이태준의 『농군』이란 소설에서도 버스안내양이 등장한다. 1973년 발표된 조선작의 단편소설을 1975년 김호선 감독이 영화화한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도 주인공 영자는 버스안내양으로 나온다. 개발주의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던 상경한 여성들의 삶을 한 몸에 녹여낸 캐릭터로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영자를 통해 당시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시내버스안내양기숙사생활 썸네일 이미지
시내버스안내양기숙사생활(1978)
영부인 이순자 여사 전국 모범버스안내양 접견 담화 썸네일 이미지
영부인 이순자 여사 전국 모범버스안내양
접견 담화(1984)
전국모범버스안내양 청와대 참석자 모습 썸네일 이미지
전국모범버스안내양 청와대 참석자 모습(1984)

1984년부터 버스에는 하차지점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버스벨이 개설되어 승객이 하차하기 직전에 버스벨을 누르면 문이 자동으로 열리게 되었다. 버스안내양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1987년 말 3만 여 명에 달했던 버스안내양은 1989년 4월 김포교통 소속 130번 버스안내양 38명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버스안내양의 평균 연령은 18세였다. 1961년 1만 2,560명이던 안내양은 1971년 3만 3,504명, 1970년대 에는 5만 여 명까지 증가했지만 19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급격히 줄고, 1989년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가 삭제되면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에는 태안·보령 등 지역에서 버스안내양이 되살아나 노인·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승하차를 돕고, 지역의 관광안내도 하는 홍보대사 노릇을 하고 있다. 여행자들은 생전 처음 보는 버스안내양의 모습에 신기해하기도 한다. 짙은 자주색 상하의에 모자를 쓴 복장까지 예전 버스안내양과 비슷하다. 디지털화로 사라진 것들이 다시 재현되는 ‘아날로그 열풍’이 따뜻한 인간미를 회복시키는 방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
  • 고용노동부(http://www.moel.go.kr)
  • 『교통통계연보』,교통부, 1987.
  • 『대한국인, 우리들의 이야기』, 기파랑, 2016.2.5.
  • 경향신문, 「‘삥땅’을 둘러싼 눈물 시내버스 여차장의 애환2」, 1970.4.29.
  • 동아일보, 「안내양에게도 의자를…….시내버스에 번지는 사랑의 운동」, 1983.3.23.
  • 월간 자동차 생활, 「버스에 매달린 버스안내양」, 2000.3.
  • 한겨레21, 「돌아온 안내양, 영자를 회상하다」, 2006.2.14.
  • 머니투데이, 「태안에서 울리는 "오라이~!"…버스안내양 확대」, 2009.2.3.
  • 뉴시스, 「보령시, 버스안내양 ‘행복버스’ 호응 높아」, 2011.4.14.
  • 부산일보, 「오라이~」, 2015.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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