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메뉴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집에 TV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새 학기가 되면 학교에서 이뤄지는 가정환경 조사.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 조사란에는 가전제품의 보유 여부와 수량을 적는 항목이 있었다. 선생님이 부르는 제품이 집에 있으면 자랑스럽게 손을 들던 기억,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고가의 제품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부럽게 쳐다보던 모습. 모두 그 시절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을 추억들일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말해주는 것들이 다양해졌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집에 가전제품이 있는 친구가 또래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가전제품의 가격이 ‘쌀 몇 가마니와 맞먹는다.’는 식의 비교가 이뤄졌던 것을 보면, 그 시절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가전제품이란 것은 먹고 사느냐의 걱정을 뛰어넘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국산 라디오의 탄생, 그 시작은 치약으로부터...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국산 전자제품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1959년 국산 치약을 만들던 락희화학(현 LG전자의 전신)이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A-501'을 선보였다. 당시 미제 치약이 아닌 국산 치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락희화학이 그 자신감으로 국산 라디오 제작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우려를 쏟아냈다. 그때 최고급 라디오로 치던 미국산 제니스 라디오가 암시장에서 45만 환, 쌀 50가마 가격에 팔렸는데, 그런 좋은 라디오가 있는데 왜 굳이 국산 라디오를 들어야 하느냐는 반응들이었다. 사람들이 갖는 품질에 대한 믿음도 부족했기에 승부수를 걸 수 있는 건 가격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가격이 2만 환이었다. 첫해 생산량은 87대. 하지만 당시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상황에서 국산 라디오의 존재는 그다지 빛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판로는 다른 곳에서 뚫렸다. 바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운동’이었다. "내가 보낸 라디오가 풍년가를 들려준다."는 구호 아래 라디오가 없던 농어촌으로 도시의 라디오를 보낸 것이다. 이 운동 시작 1년 만에 라디오 보급량은 13만 대로 늘었고, 이를 통해 라디오는 점차 전 국민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 참고 이미지
최초의 국산 라디오(1959)
라디오 모집 운동 참고 이미지
라디오 모집 운동(1962)

공개추첨부터 기업의 기술경쟁까지, 고가의 가전제품이 국민가전이 되기까지...

우리나라에 국내 최초의 흑백 TV가 등장한 것은 국산 라디오가 생산되고 7년 후인 1966년 8월이었다. 당시에는 TV를 사기 위해서는 정말 큰 결심이 필요했다.
회사 직원의 1년 연봉과 맞먹는 수준, 쌀 27가마의 가치였던 6만 8천 원이란 돈을 주고 TV를 사야 했지만, 그 수요는 상상 이상이었다. 인기를 감당 못 해 공개추첨을 통해 판매할 정도였다.

금성 텔레비전 작업광경 참고 이미지
금성 텔레비전 작업광경(1962)
금성 라디오공장 작업광경 참고 이미지
금성 라디오공장 작업광경(1962)
국산 선풍기 제작 과정 참고 이미지
국산 선풍기 제작 과정(1966)

TV가 수요자들끼리의 구매 경쟁을 통해 보급률을 높였다면, 냉장고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보급되었다. 스티로폼 박스에 얼음 몇 개 넣고 음식을 보관하던 것이 전부였던 때, 냉장고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965년 눈표냉장고(GR-120)라는 이름으로 국산 냉장고가 출시되었을 때, 가격은 8만 6백 원. 당시 대졸자 초임이 1만 천 원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는 가격이었다.

"냉장고의 보급률 역시 세계 최하위. 통계기관은 국내 냉장고 총 보유 대수를 5만 대로 추산하고 있다. 이것은 6백 가구 중 냉장고 1대 꼴."(「고급화의 물결(1)-냉장고」, 매일경제 1968년 3월 28일자 기사)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품 개발을 위해 뛰어든 회사들 간의 가전제품 점유율 경쟁으로 냉장고는 국민가전이 되었다. ‘직냉식 2도어 냉장고냐, 냉수기 부착 냉장고냐.’ 냉장고 시장을 둘러싼 기업 간의 치열한 기술 경쟁은 가격 경쟁으로 이어지면서 1965년 채 1%도 되지 않던 냉장고 보급률을 1986년 95%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나사도 하나 못 만드는 나라’라는 편견을 깨고, 국산 전자제품이 기술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통해 신뢰를 쌓아갔다.

대한민국의 바람이 세계의 바람이 되기까지...

모든 상황이 순탄하게 이어진 것만은 아니다.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선풍기는 TV보다도 6년이나 앞선 1960년에 만들어졌다. 금성사의 ‘D-301'. 금형과 모터를 개발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선풍기 설계에 착수한 지 2개월 만에 국산 선풍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엔 'D-302'를 출시했고,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3단 버튼도 부착됐다. 하지만, 전력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D-302' 선풍기는 전력 소비량을 증대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되었고, 생산중단 결정에 이어 1963년 단종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국내 최초의 가정용 에어컨은 1968년에 등장했다. 금성사의 'GA-111'. 하지만 미국의 전자회사인 제너럴일렉트릭(GE)사로부터 주요 부품을 공급받아 조립해 만든 것이었다. 진정한 국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에어컨이 생산된 것은 1980년대 말, 그 이후 대한민국의 바람은 세계의 바람이 되었다.

에어콘 참고 이미지
에어콘(1970)
텔레비전 전면 참고 이미지
텔레비전 전면(1973)
대한전선주식회사 선풍기·냉장고 생산 공장 참고 이미지
대한전선주식회사 선풍기·냉장고 생산
공장(1979)

우리에게는 전화기를 처음 사용하는 국민들에게 사용 예절을 가르쳐주던 시절도 있었고, 냉장고 없는 집을 위해 여름철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공유하던 시절도 있었다. 가정마다 TV, 냉장고, 전화기, 라디오를 모두 갖추고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때 그 시절.
이제는 우리의 생활 속에 당연한 듯 자리하고 있는 가전제품들. 과거엔 그 모두가 꿈과 선망의 대상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우리의 행복과 발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척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동아일보, 「벽지의 내 고향에 라디오라도 한 대」, 1962.9.10.
  • 매일경제, 「고급화의 물결-(1)냉장고」, 1968.3.28.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 산업통상자원부, 『흥미진진 경제 다반사 , 아이이펍, 2013.
  • 한국경제, 「건국 60년...도전의 순간들」, 2008.8.7.
  • facebook
  • twitter
  • print

관련 기술서

주제목록 보기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