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5월 14일 이른 아침부터 경성 시내 인사동 태화여자관에서 운영하는 태화진찰소 앞마당에 200여 명의 아기들과 부모들이 모였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생후 3개월에서 5살까지의 어린이들의 건강 상태를 심사했다. 이날의 행사는 ‘어린이 건강 진찰 대회’였다. 요즘 말로 하면 ‘우량아 선발대회’와 같은 것이었다. 1933년 11월 23일 서울 안국동 유치원 자모회는 ‘제1회 건강아동 표창식’을 열었는데, 대회에 참가한 42명 중 특등으로 뽑힌 4세 여자 어린이의 체중이 약 15.9kg으로 오늘의 보건복지부 표준체중 16.3kg에 미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인 자녀들의 양육 상태는 좋았으나 조선 아동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해 이런 결과를 얻었다. 이처럼 1920~30년대까지 아이들의 건강을 확인하는 다양한 건강아동선발대회가 있었다.
이와 비슷한 행사로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회사업협회가 주최한 유아애호주간(幼兒愛好週間)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행사에는 어린이의 건강검진, 영양강습회 같은 계몽 사업이 펼쳐졌으며, 1933년 유아애호주간은 5월 2일부터 8일까지 일주일 동안을 젖먹이 주간으로 정하기도 했다. 6.25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에는 어린이날에 즈음해 우량아를 선발하는 행사를 전국 곳곳에서 열었다. 정부에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 정서나 건강을 생각해 우량아 선발대회를 적극 홍보하였다. 국민들도 포동포동 살찌고 덕성이 있어 보이는 아이들이 우량아로 선발되는 것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 실제로 1953년 경주에서 최우량아로 뽑힌 생후 9개월짜리 남자아이는 체중 9.75kg, 신장 41cm에 머리둘레가 46cm나 돼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서울에서도 어머니 포대기에 안긴 수 백 명의 어린이가 선발대회에 참가해 최우량아 4명, 우량아 12명, 가량아 360명이 뽑혔다. 우량아 선발대회는 워낙 인기가 높아 예심, 초심, 재심, 결심 등 몇 단계를 거쳐 진행됐다. 심사장에서는 낯선 의사가 무서워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거나 대소변을 보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어른들은 마냥 즐거웠다. 모두 못 먹고 살던 시절이었기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우량아들을 보면서 내 아이도 저렇게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대리만족을 얻었기 때문이다.
1965년에는 서울시와 대한소아과학회 주최로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에서 ‘베이비 서울’ 우량아 선발대회가 열렸다. 이러한 행사는 1960년대 주로 열렸으며, 각 지방마다 열려 베이비 서울, 베이비 부산 등의 우량아가 탄생했다.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의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해 우량아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라도 튼튼하고 건강해야 우리의 미래가 밝으리라는 기대를 가졌으며, 우량아 선발대회에는 아이가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랐으면 하는 부모들의 소원이 담겨 있었다.
1962년 2월 23일 조선일보 1면에 토실토실한 남자 아이가 옷을 벗고 앉아 찍은 사진이 실렸다. 요즘 같아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동네 사진관 진열장에 올 누드 돌 사진이 흔하게 걸려있던 시절이니 신문에 그런 사진이 실렸다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사진은 제6회 대구시 비락 우량아 선발대회를 후원한 회사가 최우량아 선발을 알리는 형식을 통해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실은 광고였다. 1962년 6회째 대회가 열렸던 것으로 보아 이 우량아 선발대회는 이미 1957년부터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우량아 선발대회는 분유회사가 자사의 제품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했던 우량아 선발대회는 문화방송이 주관하고 남양유업이 후원한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였다. 이 대회는 1971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 시작은 미래의 국력인 아기들의 건강과 체격 향상을 위해 마련된 사회공헌 행사였다. 이 대회는 생후 6∼24개월 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몸무게와 발육상태 등에서 양호한 아기를 뽑아 상을 주었다. 배고프던 시절, 뚱뚱한 사람은 모두 부자라는 인식이 있던 때라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뽑힌 우량아기는 당시 자녀를 가진 모든 부모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량아의 선발 기준은 가족이 건강하고 병력이 없어야 하고, 각종 예방 접종을 빠짐없이 마쳐야 했다. 또 기능 발달이 나이 수준에 맞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영양 상태를 판별했다. 영양 상태의 판별 기준은 체중과 신장의 균형, 머리와 가슴둘레의 균형, 두상, 혈색, 피부 긴장도, 근육과 골격의 발달, 치아 수, 젖을 뗀 시기 등이었다. 이러한 기준에 가장 적합한 아이가 우량아로 선발되었다. 해마다 열리던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는 어린이날을 앞둔 4월에 시도별 예선을 거쳐 서울에서 본선 대회를 열었다. 본선 대회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체검사가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심사위원은 소아과의사, 여상단체 대표, 무용과 교수, 미술과 교수 등이 맡았고 대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간호사 3명과 주최측 직원들이 행사를 도왔다.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는 방송을 통해 방영을 할 만큼 대단한 인기였다. 대회에서 뽑힌 아이들은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목에 무거운 메달을 걸고 사진을 찍었다. 또한, 우승자에게는 1년 치의 분유와 상금이 선물로 주어졌다. 수상자 중에서는 분유 광고 모델이 나오기도 했다.
‘내 아기를 튼튼하고 건강하게'라는 표어를 걸고 1983년까지 진행된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는 연인원 2만 여 명이 참가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1975년 자료에 의하면, 전국에서 무려 6,148명이 참가했는데, 서울에서 826명, 지방에서 5,322명이 참가해 최우량아 1명, 우량아 2명, 준우량아 12명이 선발되었다.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가 인기가 많았던 것은 정부의 당시 분위기도 한 몫 했는데, 튼튼한 아이는 부모의 기쁨인 동시에 미래의 국가자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애초 시작은 아이들의 건강을 생각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이었으나, 대회가 진행될수록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는 분유를 먹고 자란 살찌고 토실토실한 아이가 건강한 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못 먹는 아이가 줄고 아기들을 상업화한다는 이유로 1984년 폐지되었다.
요즘은 분유회사에서 주최하는 우량아 선발대회 대신 각 자치단체들이 모유만 먹는 아기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한 아기 선발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모유는 아이에게 필요한 필수 영양성분들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면역력을 높이는 효과까지 있는 것으로 밝혀져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모유 수유율은 그다지 높지 않다. 이러한 대회는 심사 기준이 예전의 우량아 선발대회와는 달리 많이 다양해졌다. 키와 몸무게, 머리둘레 등 신체발달 정도를 측정하는 것은 똑같지만, 건강진단과 모자 애착도 검사, 모유 수유에 대한 엄마 인터뷰, 뒤집기, 기어가기, 혼자 오래 서 있기, 걸음마 등 월령별 발달상황 검사도 병행한다. 특히, 실제로 모유 수유를 하는 과정도 평가의 일부로 삼고 있다. 이런 대회를 개최한 이유는 모유 수유를 더욱 대중화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