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수학여행을 해외로도 많이 간다지만, 아직도 수학여행의 대명사라고 하면 경주일 것이다. 경주에서도 빠지지 않고 꼭 들르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석굴암이다. 이러다 보니 석굴암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은 사람이 흔하지 않을 정도인데, 정작 석굴암 안에 들어가 꼼꼼히 살펴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석굴암은 유리로 가려진 채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석굴암의 개보수 과정에서 벌어진 실수들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대체 석굴암은 언제부터 이렇게 일반에게 거리감있는 문화재로 남게 된 것일까?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에 세워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다. 뛰어난 건축미, 성숙한 조각기법 등을 보여주는 역사 유적으로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해 인공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그 내부는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을 통로로 연결하였다. 이는 인도의 석굴형식의 절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우리나라는 화강암이라 석굴이 파지지 않아 인공으로 석굴을 만들어 그곳에 부처님을 모신 것이다. 조각은 동서양의 미술이 조합된 간다라미술의 영향을 받고 있다. 주실은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만든 궁륭(dome형) 천장인데 신라인들의 정교하면서도 발달된 과학적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석굴암은 세계 유일의 인조 석굴이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석굴암석굴로, 일연의 『삼국유사』에,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착공한 것이라 하였다. 그는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고 한다. 당시의 정식 명칭은 석불사였다. 석굴암의 착공은 김대성이 했지만 건축기간이 장장 40년이 걸려 김대성은 살아생전 석굴암의 완성을 지켜보지는 못했고 마지막 마무리는 나라에서 했다.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신라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인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어 김대성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신라 왕실의 뜻과 당시 백성의 염원이 담긴 국가적 건축물이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완공된 석굴암에 대한 이후 기록은 조선 중기 이후의 기록만 남아 있는데,『불국사고금창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등이 그것이다. 『불국사고금창기』는 1703년(숙종 29)에 석굴암을 중수하고 또 굴 앞의 돌계단을 쌓았으며, 1758년(영조 34)에 다시 중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당시 석굴암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정시한이 방문한 1688년 5월 석굴의 전실과 후실의 석상들이 완전한 형태로 건재할 뿐 아니라 입구의 홍예(虹蜺), 본존상(本尊像)과 좌대석(座臺石), 주벽(周壁)의 여러 조각들, 천개석(天蓋石)들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당대 문인과 승려들이 석굴암을 방문한 후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석굴암은 정선이 1733년에 그린 『교남명승첩』 2권 중에 그림으로도 남아 있다. 이 화첩은 당시에 전실(前室)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실 입구에 목조전실을 첨가하는 데 귀중한 자료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200∼300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 유지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조선 말기까지 석굴암은 경주지역 사람들이 이용하는 절이었고 조예상에 의해 크게 중수된 적도 있어 ‘조가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1907년 마치 자신들이 석굴암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선전하고 석굴암을 해체 반출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는데 경주지역 사람들의 반발로 무마되었다.
국보 제89호 석굴암석굴관람자에 대한 일제강점기에는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가 석굴암을 방문한 뒤, 1913년 중수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석굴암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석굴암을 지은 신라 사람들의 과학적 건축 기법을 이해하지 못한 일제의 학자들은 석굴암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원형을 변형시켜 버렸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시멘트를 사용해 이는 오늘날까지도 석굴암 보존상의 커다란 문제꺼리를 남겼다. 석조물에 시멘트를 부가함으로써 석조물을 약화시켰고, 석굴을 하나의 응결된 콘크리트 덩어리로 만들어 통풍구를 막아버린 것이다. 일제가 행한 시멘트 개보수로 석굴암의 환기구들이 막혔고, 습기를 아래로 모으는 감로수도 없애서 석굴에는 습기가 차 불상에 결로가 생겼고 화강암이 침식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 뒤로 일제는 몇 차례나 다시 중수를 시도하였으나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광복 후 50년대에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석굴암에 대한 간략한 조사만 있었을 뿐 그대로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1960년대에 마침내 정부에서 3년간에 걸쳐 석굴암 복원작업을 하였지만, 결국 일제가 망쳐놓은 부분을 해결하지 못한 채 결로현상은 계속되었다. 결국 석굴암은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벽 속에 온풍기와 에어컨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습기를 조절하고 있다. 현재 방문자는 안타깝게도 석굴 내부로 들어갈 수 없고 석굴 밖에서 유리 안 정면의 본존불만 보고 올 뿐 석굴안의 모습이나 그 안에 새겨진 부조들은 관람이 불가능하다.
석굴암은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