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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명령은 국가비상사태에 처했을 때 국가긴급권(國家緊急權)에 근거하여 발하는 명령이다. 이는 평상시의 헌법상의 기본원칙에 대한 중대한 예외사항으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법률에 의하지 않고 명령으로서 제한할 수 있는 법률적 효력을 가진다.

국가긴급권은 국가마다 차이가 있는데, 독일, 일본의 경우에는 과거 독재정권이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했던 경험 때문에 국가긴급권을 규정하지 않고 있으며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사후책임면제법 제도’라든지 ‘마셜법(Marshall law)’ 등을 두어 이에 대처하고 있다. 일부 국가는 미리 국가긴급권을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하고, 발동요건·절차·내용·효력·통제 등에 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위헌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제5공화국 헌법에서는 약간 완화하였으나 역시 헌법적 효력을 가지는 비상조치제도를 두었다. 현행(1987년 개정) 헌법은 제5공화국 전으로 돌아가 법률적 효력을 가지는 긴급명령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대한뉴스 제891호] 박정희 대통령 긴급명령 발표(1972, CEN0000808(1-1))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제891호] 박정희 대통령 긴급명령 발표(1972)

6.25전쟁 상황에서 공포된 긴급명령 1호

대한민국 긴급명령 1호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에 공포한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다. 비상사태 상황에서 벌어지는 반민족적 또는 비인도적인 범죄를 신속히 엄중처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하였다. 재판과정은 단심(單審)으로 진행되며, 판결에 있어서 증거설명이 생략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 BA0158831(1-2)) 참고이미지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

6.25전쟁 시기 대부분의 법령 공포는 긴급명령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공포방식은 신문, 라디오를 포함하여 기타 적당한 방법으로 하였다. 「금융기관 예금 등 지불에 관한 특별조치령」(대통령령 긴급명령 제2호), 「철도수송화물 특별조치령」(대통령령긴급명령 제3호), 「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대통령령긴급명령 제5호),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대통령령긴급명령 제6호), 「비상시 향토방위령」(대통령령긴급명령 제7호) 등이 그것이다.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제15호

정부가 주도한 경제개발에 의해 고도성장을 달리던 한국경제는 1969년 이후 많은 기업의 재무상태가 부실화되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70년대 들어 실물 경제 위축과 수출 둔화가 나타나고 은행 차입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사채를 끌어들여 부족한 현금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채시장의 이자가 기업의 회생과 존립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정도였으며 차입 규모가 너무 커졌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정부는 지속적인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72년 8월 3일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 제15호」(「8·3긴급금융조치」)를 발포하였다. 조치 내용으로는 ① 기업은 사채의 상환을 중단하고 사채규모를 정부에 신고해야 하며 ② 기업은 사채를 월리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의 조건으로 사용하고 ③ 금융기관은 2천억 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하여 기업의 단기고리대출금의 30%를 장기저리대출금으로 바꾸어 자금을 방출하며 ④ 정부는 기업의 투자촉진을 위해 법인세와 소득세를 감면하고 교부세의 법정교부율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1972, BA0084681(16-1)) 참고이미지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1972)

이 재정긴급명령의 발동으로 3,500억 원 규모의 사채가 동결되고, 기업들은 1,460억 원의 일반대출과 520억 원의 특별대출 350억 원 산업합리화 자금을 공급받는 등 엄청난 특혜를 누렸다. 반면 사채를 빌려주었던 소자산가들은 순식간에 자신의 재산을 강탈당했고 서민에게 은행대출의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의 압박이 전가되는 등 막대한 피해가 돌아갔다.

금융실명제를 탄생하게 한 「대통령 긴급재정 경제명령 제16호」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는 금융기관과 거래를 할 때 가명이나 차명이 아닌 본인의 실명으로 거래해야 하는 제도이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에 의거하여 1993년 8월 12일 이후 모든 금융거래에 도입되었다. 발표 다음날인 1993년 8월 13일부터 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등의 신분증이 없으면 통장을 만들 수 없고 계좌이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세금이 발생하는 거래도 전부 실명을 통해야 가능하므로 전혀 생각도 못했던 세금 환수율 상승효과까지 거두었다. 이후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 1997년 12월 31일 법률 제5493호로 제정되었다.

대통령 긴급재정 경제 명령 제16호의 국회승인에 관한 공포안(1993, BG0001548(2-1)) 참고이미지
대통령 긴급재정 경제 명령 제16호의 국회승인에 관한 공포안(1993)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의 정상화를 기하여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고, 금융거래에 투명성을 부과하는 게 목적이었다.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82년 '장영자·이철희 사건'이라는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했던 시점이다. 이 사건은 1982년 당시 전두환 전(前)대통령의 처삼촌의 처제이던 장영자(張玲子)와 그의 남편 이철희(李哲熙)가 일으킨 거액의 어음사기사건이다.

정부는 1982년 7월 3일 '7·3 사채 양성화'를 필두로 하여 1982년 12월 31일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법률 제5493호)」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금융실명화율이 60%에 불과할 정도로 비실명 관행의 뿌리는 깊었고 전산 및 세무행정의 처리능력도 실명제 실시에 대처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금융실명제 유보 이후에도 정부는 금융실명거래 촉진을 위한 조치로써 1983년 7월, 비실명 금융자산에 대한 차등 과세 폭을 단계적으로 확대하였으며 가계종합예금·저축예금·세금우대저축 등 실명으로만 거래가 가능한 금융상품을 보급하여 실제 명의의 거래를 촉진하였다. 1988년부터는 금융실명제준비단을 설치하여 제도의 실시를 연구하였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와 이 제도의 실시를 우려하는 반대에 부딪혀서 보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실명제에 대한 논의가 계속 제기된 것은 검은 돈과 관련된 정경유착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명분으로 시행을 미뤄 온 금융실명제는 1993년 8월 12일 20시를 기하여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으로 전격 실시되었다. 정부가 금융실명제를 긴급명령에 의해 전격적으로 실시한 이유는 금융시장의 동요 등으로 경제에 막대한 혼란이 예상되므로 이러한 부작용을 단시일 내에 최소화하려는 정부의 의도였다.

(집필자 : 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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