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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한 옷차림에 집안 살림 무너진다 간소복

패션은 현대인의 자기개성의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패션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1990년대까지도 알게 모르게 국가에서 국민들의 패션에 참견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국가 주도하에 공무원을 중심으로 ‘간소복을 입자’는 운동이 꾸준히 펼쳐져 왔다. 후반으로 갈수록 민간에 대한 통제는 느슨해져 간소복이라는 용어조차 낯설게 느껴졌지만, 공무원 사회에서는 간소복입기가 계속 진행되었다. 21세기 들어와 이런 국가 주도의 운동은 사그라들었지만, 최근에는 여름철 에너지절약 차원에서 공무원과 공기업의 간소복입기운동이 또 다른 의미와 디자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6.25전쟁 이후 신생활 운동의 전개

6.25전쟁이 끝나고 2년 뒤인 1955년, 당시 정부는 사회 사치·부화(浮華)를 금지하고 검소·절약을 위한 ‘신생활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6.25전쟁 이후 전후 수습 차원에서 일어난 정부 주도의 운동이었다. 그 일환으로 국회는 공무원과 국무위원을 중심으로 ‘신생활복(재건복)’을 입을 것을 정하고 이를 국가적 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이전까지 일반 국민들의 일상복으로 주로 이용되던 한복 대신 단순하고 활동에 편한 재건복을 입어 국가 재건에 힘쓰는 시간을 늘리자는 취지였다. 이는 한복의 옷감을 아끼기 위한 조치였다. 한복을 만들어 입을 옷감까지 아껴야 할 만큼 1950년대 우리나라의 물자난은 극심했고 경제상황은 좋지 못했다.

사치·부화를 금지하고 검소· 절약을 하는 신생활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라 참고 이미지
사치·부화를 금지하고 검소· 절약을 하는 신생활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라(1955)
신생활운동을 학생에게만 맛기지 말고... 참고 이미지
신생활운동을 학생에게만 맛기지 말고...(1960)

이 신생활 운동은 1960년 4.19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학생들에게만 신생활운동을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도 적극적으로 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으며, 고급요정 폐지, 밀수품 소각 운동도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제1공화국 당시의 신생활 운동은 실제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을 뿐, 정부 고위직들은 여전히 고급요정을 드나드는 사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생활 운동이 전국민 운동으로 확대된 것은 1961년 5.16 이후의 일이었는데, 특히 의복의 사치를 막고 간소복을 입자는 신생활복운동이 정부 주도로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간소복입기 운동

5·16 이후 설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는 1961년 6월 그 산하기관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再建國民運動本部)를 발족시켰다. 이 운동본부에서 본격적으로 재건운동을 범국민차원에서 전개하였다. 범국민운동 실천 요강의 5개 항은 '용공 중립주의를 배격하자, 내핍생활을 강행하자, 근로정신을 발휘하자, 생산을 증진하자, 도의심(道義心)을 앙양하자' 였는데, 이들 요강을 실천하는 한 방편으로 간소복입기운동이 전개되었다.

정부는 ‘표준 간소복’의 디자인을 정해 공무원부터 먼저 간소복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그 형태는 오늘날의 ‘민방위복’과 유사하였으며, 의전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넥타이를 매지 않도록 했다. 여성의 경우는 간편한 원피스 형태였다. 이밖에 한복도 옷감이 많이 들지 않는 개량한복을 디자인하여 공시하였다. ‘공무원 신생활복 착용’ 관련 문서를 보면, 마지막에 간소복의 옷본을 제시할 정도로 자세하게 정하고 있다. 1961년 당시는 모직 70%, 면직 30% 정도를 기준으로 그 이하 수준의 옷감을 권장하였지만, 1963년도에는 옷감에 대한 기준이 이보다 더 엄격해져서 모직 10%, 면직 30% 이하였다. 또한 당시 표준 간소복은 한복에 비해 돈이 적게 들고 옷값에 소비되는 돈을 아낄 수 있는데다 착용 시 새로운 정신을 함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제정되었다고 한다.

공무원 신생활복 착용 참고 이미지
공무원 신생활복 착용(1961)

정부는 표준 간소복 착용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홍보를 추진했다. 1961년 6월 25일 6.25전쟁 11주년 기념식에서 재건운동 서울시지부는 여성 신생활 복장을 시민에게 공개하였다. 10여 명의 유명 배우들이 간소복을 입고 모델로 나서 가두행진을 했다. 이때 가두행진 차량에 쓰여진 운동 표어는 ‘사치한 옷차림에 집안 살림 무너진다.’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신생활 간소복 패션쇼’를 열었다. 영화배우들이 모델로 등장하였고, 농민들이 입는 농민복에서 사무복까지 37점의 간소복이 관람객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소복 착용은 정부 차원의 반강제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호응은 높지 않았다. 간소복입기에 솔선수범해야할 공무원들부터 이 운동에 그다지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여배우들 ‘검소한 복장으로 새살림 이룩하기’ 시가행진 참고 이미지
여배우들 ‘검소한 복장으로 새살림 이룩하기’
시가행진(1961)
재건국민운동 주최 ‘신생활 간소복 패션쇼’ 참고 이미지
재건국민운동 주최 ‘신생활 간소복 패션쇼’
재건국민운동 주최 ‘신생활 간소복 패션쇼’ 참고 이미지
재건국민운동 주최 ‘신생활 간소복 패션쇼’
멋있고 값싼 간소복 참고 이미지
멋있고 값싼 간소복(1963)

당시 신문기사 중에는 행정부서의 어느 장관이 간소복을 착용하지 않아 그 이유를 묻자 “간소복을 하루 종일 입으면 왠지 정신적으로 부담이 가고 여유가 없어 월요일에만 근무복을 입는다”고 한 기사도 있다. 학생들의 간소복 차림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언론 사설에는 “교복 입은 학생들은 꼭 군인 같고 나쁘게 말하면 죄수들 같다.”고 묘사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운동이 아니라 정부에서 하는 반강제적 운동이다 보니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간소복운동으로 이전까지 일상생활에서 한복을 입던 문화는 사라지고 양장이 일상화되었다. 기혼 여성들이 쪽진 머리를 자르고 퍼머넌트를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간소복은 1970년대 이후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새마을복으로 대체되었고, 일반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공무원들의 간소복 착용은 1996년 사회 전반의 자율화 분위기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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