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여름, 휴전협정이 막바지에 이를 때다. 최전선에선 휴전을 앞두고 피아(彼我)간에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로가 극도로 날카로운 가운데 바로 그 최전방 아군부대에 북쪽 인민군장교 한 사람이 넘어왔다. 정적과 긴장이 감도는 수풀을 헤치고 어둠을 뚫고 온 사나이는 품속에서 사진 한 장을 불쑥 내민다. “이 여자를 찾아주시구레. 내레 이 여자를 찾아주기만 하면 저쪽 정보 몽땅 넘겨주갔수다. 부탁이야요!” 달랑 여자사진 한 장을 들고 목숨을 걸고 적 진영으로 투항해 온 것이었다. 이쯤 되면 낭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구한 운명에 더 가까운 사연이다.
1960년대 후반 KBS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한운사 극본의 드라마 ‘남과 북’이다. 이산가족 찾기의 원조라고나 할까. 훗날 영화로도 두 번이나 제작되었고, TV드라마로도 만들었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때는 모든 연속극이 방송될 때마다 주제가라는 것이 있었고, 때로는 그 주제곡이 음반으로 나와 히트가요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 고운 마음씨는 달덩이 같이/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우선 가사만 들어도 그 절절함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이 노래가 느닷없이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11월 14일까지 무려 138일간 KBS-TV를 통해 나가는 바람에 새삼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한국방송공사(KBS)가 6.25특집으로 내보내기 시작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특별생방송에서이다. 그날 이후 이 노래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제목으로 마치 이산가족 찾기의 주제가처럼 돼 버렸다. 어디서든 이 노래만 나오면 가슴이 울컥하고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KBS는 당초 이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생방송을 오래할 생각이 아니었다. 어차피 라디오에서 한 코너로 쭉 해오던 일이었고, 설마 무슨 특별한 반응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방송이 나가자 전국이, 온 나라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방송이 나갈수록 헤어진 가족을 찾는 신청 사연들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늘어났고, 그때는 아스팔트뿐이던 여의도광장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KBS 건물 벽도 모자라 길바닥까지 누가 누구를 찾는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적은 벽보가 겹치기로 나붙었다. 스튜디오 안에서는 생방송에 출연해 카메라 앞에 자기 얼굴을 내보이려는 이산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리고 하나 둘 꿈에도 그리던 이산가족상봉이 실제로 이뤄졌다. 이제 방송을 그칠 수가 없었다. KBS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한 채 매일매일 하루 종일 철야로 오로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생방송만 진행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온 국민들은 박수를 치고 함께 울었다. 밤이고 낮이고 새벽이고 밤중이고 TV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모두가 그들과 함께 울어 눈이 퉁퉁 부었다. 이 소식은 급기야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전해지게 되었고, 텔레비전 영상시대의 또 하나의 기적으로 소개되자 해외동포들 가운데서도 이산가족을 찾는 사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쟁고아로 입양된 사람, 피란과정에서 손을 놓치는 바람에 흘러, 흘러 낯선 이국에서 몇 십 년을 살게 된 잃어버린 사람들...
날이 갈수록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비극과 아픔이 전 지구촌에 알려지게 되었고, KBS의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 세계인의 관심 속에 공통의 화제로 떠올랐다. 어떻게 이 지구상에 저런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 주로 전쟁 때문이긴 하지만 가족이 흩어져 30년이 넘도록 만나지를 못하다니! 결과적으로 KBS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생방송은 이산가족 찾기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대한민국 근대사에 이처럼 비극적인 사연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도처에 깔려있다는 점도 여실히 부각되었다. 대부분 6.25전쟁 때 헤어져 찾지 못한 경우들이지만 국내만 해도 이렇게 이산가족이 많은데, 하물며 남북으로 갈라져 만나지 못하는 줄잡아 1천만 이산가족의 아픔은 얼마나 큰 고통인가.
이산가족문제는 이 방송을 계기로 비로소 남북한 당국과 세상에 던지는 시급한 숙제이자 화두가 되었다. 애당초 길게 잡지 않았던 방송이 무려 453시간 45분 생방송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올랐고, 그 기간 동안 진행자를 포함한 프로그램 관계자들 모두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오로지 전투를 치르듯이 방송에만 몰두했다. 방송이 나가는 동안 가족을 찾아달라고 신청했거나 참여한 이산가족은 10만여 명, 소개된 사연의 주인공은 53,536명이었으며, 방송기간 중 만난 가족상봉은 총 10,189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의도 KBS를 찾아 애타게 광장주변을 헤맨 사람들도 20여 만 명으로 추산했다.
도대체 이 나라에는 서로 만나야 하고 찾아야 할 이산가족이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 6.25전쟁 등을 통해 헤어지고 흩어진 이산가족이 대부분이지만, 그동안 국가나 관련 단체들은 문제해결이나 역할에 그다지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물론 그 한쪽에는 북한이라는 또 하나의 당사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살아 생전에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지만 그쪽의 가족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 KBS의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그런 의미에서도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고, 그 후 2년 뒤인 1985년의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 공연단’ 동시방문으로 시작된 남북이산가족 상봉현실화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보다 훨씬 전의 이산가족 찾기는 6.25전쟁이 끝난 지 18년 만인 1971년에 당시 대한적십자사사 총재가 ‘남북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북측에 제의하면서 시작된 바 있다. 그러나 북측은 그때마다 찔끔찔끔 온갖 핑계를 대며 마지못해 응하다가 흐지부지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KBS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이후에야 19차례 대면상봉과 7차례의 화상상봉 등을 통해 26,000명이 재회했다.
지금도 여전히 남북한이산가족 상봉문제는 원활히 이뤄지지 않고 당사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고령으로 절망감만 더해 가고 있다. 그래서 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가 가슴을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