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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규율 사이, 방송의 길을 찾다 패션쇼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고유의 옷인 한복 대신 소위 양장, 즉 서양식 의복을 입기 시작한 지 100여 년이 넘었다.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서양식 의복은 그 간편함과 실용성으로 한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파고들어 이제 옷이라고 하면 으레 양장을 말하고, 한복은 특별한 행사때에나 입는 옷으로 밀려나 있다. 양장이 우리의 일상복으로 자리잡기까지는 광복 후 활동한 패션디자이너들의 활약이 컸다. 최경자, 노라노, 앙드레 김까지 우리나라 패션계를 이끈 디자이너들은 광복 이후 1950년대부터 패션쇼 등을 통해 우리나라 패션 산업을 꾸준히 성장시켰다.

우리나라 패션계의 선구자들

서양식 의복이 처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각광받은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복이 들어온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한복은 꾸준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복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옷감을 사서 집에서 한복을 지어 입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재건운동이 시작되자 옷감이 적게 들고 간편한 양장을 입자는 운동이 펼쳐졌다. 이른바 ‘간소복운동’이었다. 그 와중에 한국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양장 옷들을 개발한 디자이너들의 노력이 있었고, 1970년대 들어서면서 기성복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맞춤복이 아니라 누구나 양장을 손쉽게 사 입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양장은 완전히 우리의 삶 속에 정착하였다.

사실, 1970년대 기성복이 대량생산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에서 옷을 직접 지어 입거나 옷을 만들어주는 의상실, 양장점에 가서 양재점에 가서 맞추어 입어야만 했다. 이러한 양장점의 시대, 즉 광복 후부터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패션계를 이끈 사람들은 최경자, 노라노, 앙드레 김 등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명동 일대에 자신의 이름을 건 양장점을 차리고 여배우나 고관들의 부인, 주한외국인 대사 부인 등에게 맞춤옷을 판매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쌓아 갔다. 그들이 디자인한 옷들은 매년 패션쇼를 통해 발표되었고, 이 패션쇼를 통해 발표된 디자인을 참고하여 일반 지역 양장점에서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우리나라 패션업계의 유행을 선도하고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패션용어로 말하자면, 트렌드세터(Trendsetter)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패션쇼는 그해 패션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김경희 패션쇼 참고 이미지
김경희 패션쇼(1958)
김순옥 의상발표회 참고 이미지
김순옥 의상발표회(1963)
도재은 패션쇼 참고 이미지
도재은 패션쇼(1967)

우리나라 패션쇼의 역사

지금도 패션업계에서 패션쇼는 중요한 행사이다. 특히, 파리에서 2년 마다 열리는 패션위크(Fashion Week)의 패션쇼는 전 세계 유행을 선도하는 영향력있는 행사이다. 전 세계인이 입을 옷의 스타일이 이 패션쇼에서 결정되는 셈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디자이너들이 심심찮게 파리에 초청받아 패션쇼를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 패션업계를 세계가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패션쇼는 디자이너 노라노가 연 것이 최초이다. 노라노(본명 노명자)는 19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크 웨건 대학에서 양재(洋裁)를 배우고 귀국한 후 1955년 명동에 자신의 이름을 건 양장점을 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56년 10월 29일 서울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를 열게 된다. '찔레꽃'의 작가 김말봉이 사회를 보고, 모델이라는 직업이 따로 없던 시절이라 미스코리아 출신의 강귀희와 무용가 김백초, 그리고 영화배우들이 무대에 섰다. 그러나 초창기 패션쇼는 양장을 제대로 입을 줄 몰라 뒷단추로 된 옷의 앞뒤를 바꿔 입는다거나 스커트의 앞뒤를 바꿔 입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노라노의 패션쇼 이후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은 패션쇼를 자신의 작품발표회로 자주 이용하였다. 일제강점기때부터 양장점을 했던 최경자의 패션쇼가 열렸고, 최경자에 사사한 앙드레 김이 1962년 패션쇼를 열어 디자이너로 데뷔하면서 우리나라 패션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앙드레김의 패션쇼는 이후 우리나라 패션쇼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와 인지도를 얻었다.

최경자 복장발표회 참고 이미지
최경자 복장발표회(1957)
문화계 소식_앙드레김 의상발표회 참고 이미지
문화계 소식_앙드레김 의상발표회(1963)

1960년대의 패션쇼는 큰 행사였던지 대한뉴스에서 이를 보도할 정도였다. 당시 가난했던 우리나라 상황에서 패션쇼 같은 화려한 행사를 벌이는 데 대한 부담이 있었던 탓인지 자선행사 형태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초대되는 손님은 주로 사회명사나 고관의 부인, 주한대사의 부인 등이었고 모델은 배우들이 많았다.

1970년대 들어서면 패션쇼의 경향이 다소 바뀌었다. 1960년대만 하더라고 디자이너 중심의 패션쇼로 기업은 옷감의 홍보를 위해 패션쇼를 열었는데, 1970년대에는 기성복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기성복 업체 주도의 패션쇼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대한뉴스 793] 이런일 저런일_경남모직 의상발표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793] 이런일 저런일_경남모직 의상발표(1970, 국립영화제작소, CEN0000710, 4-1)

이후 패션쇼는 우리나라의 패션계 성장과 더불어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졌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패션위크에서 패션쇼가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고,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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