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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상징에서 국민의 상징으로 경복궁 복원

“이제 우리가 경복궁을 복원하려는 것은 남에 의해 훼손된 민족사에 대한 긍지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다음 세대에게 민족문화의 참된 모습을 전하여 그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밝은 미래를 힘차게 열어가게 해야 합니다...(중략)... 영광된 역사는 자존자강하는 문화를 창조하는 민족이 누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복원될 경복궁은 민족자존을 온 국민의 가슴속에 내면화 시켜가는 살아있는 역사의 장이 될 것입니다.”(1991년 6월 5일 ‘경복궁 복원 기공식’ 대통령 연설문 중에서)

경복궁 복원 기공식 연설문 참고 이미지
경복궁 복원 기공식 연설문(1991)

경복궁, 그 수난의 역사

광화문 근처에는 경복궁을 보러 온 국내외 관광객들로 항상 북적인다. 얼마 전에는 경복궁 단기 야간개장에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그 인기를 실감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화사하고 행복한 광경 이면에 경복궁은 우리나라의 질곡의 역사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경복궁은 원래 조선시대 법궁(法宮)으로 지어져 국가 최고의 궁궐자리에 있었지만. 조선 500년을 통해 제대로 법궁의 역할을 한 것은 채 300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이 몰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만신창이가 된 대표적인 궁궐이기도 하였다.

경복궁이 처음 지어진 것은 조선이 개창한 지 4년만인 1395년(태조 4)이었다. 조선 왕조가 개성을 떠나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면서 지은 첫 번째 정궁이었다. 궁궐의 명칭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복궁이 자리한 땅은 삼각산을 뒤로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이 둘러싸고 있어 풍수적으로도 좋은 입지였다. 경복궁은 이후 창덕궁 등 몇 개의 궁이 더 지어졌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조선 제1궁으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수도 한양이 왜적에게 짓밟히는 와중에 경복궁은 화재로 전소되었다. 화재 원인에 대해서는 피난가는 선조 임금에게 앙심을 품고 신분제에 원한을 가진 노비들이 노비문서가 있는 전각을 태우려다 전소되었다는 이야기, 왜적이 불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은 이후 재건되지 않은 채 폐허로 남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제1궁은 창덕궁이었다.

경복궁 재건은 1865년(고종 2)에 가서야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시작되어 1868년에 완성되었다. 경복궁은 270여 년 만에 정궁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이후 경복궁의 역사는 순탄치 못했다.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고,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겨간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경복궁의 수난은 그야말로 비극적이었다. 일제는 한국의 정신을 모욕하기 위해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훼손하였다. 일제는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어 민간에 팔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경복궁의 훼손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개최된 이른바 '시정(始政)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였다. 일제는 이 행사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는 경복궁을 가로막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광복 후에도 경복궁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 속에서 서울 시가전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얼마남지 않은 경복궁 전각 일부가 폭격에 사라지기도 했다. 광화문도 이때 폭격을 피해가지 못하고 뼈대만 남게 되었다. 1952년 휴전협상이 부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당시 부산에 있던 정부는 경복궁의 복원에 대해 국무회의에서 잠깐 논의했지만, 이를 진행할 재원이 없어 손놓고 기부만을 바라는 형국이었다.

경복궁 등 원상회복에 관한 건 참고 이미지
경복궁 등 원상회복에 관한 건(1952)
중앙청을 철훼하여 경복궁을 수축(修築)하고... 참고 이미지
중앙청을 철훼하여 경복궁을 수축(修築)하고...(1952)

결국 경복궁은 6.25전쟁 후에도 여전히 복원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일반에도 공개되지 않다가 1960년 4.19 이후 차츰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장엄한 궁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지나면서 훼손된 그대로 공개되었기에 문화재적으로나 국민 정서적으로나 한국의 대표 궁궐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는 부족함이 많았다.

경복궁 공개 참고 이미지
경복궁 공개(1960)

민주화와 함께 시작된 경복궁 복원사업

경복궁의 복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1960년대에 공개된 경복궁이 30여 년 동안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이유는 경복궁 뒤로 청와대가 자리하면서 이를 방위하는 군대가 경복궁의 후원 일부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뼈대만 남은 광화문이 1960년대에 콘크리트로 복원되는 등 단편적인 복원작업으로 명맥만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987년 대통령직선제가 실시된 이후, 군대나 정부가 점거하고 있던 지역과 시설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정책들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제대로 된 복원과 민족문화의 재정립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복궁에 대한 대대적이고 장기적인 복원사업도 이때 시작되었다.

정부는 1990년부터 20년 계획으로 1차 복원정비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에 정부는 경복궁의 전면을 막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마침내 철거하였다. 1차 정비사업은 2010년 완료되었는데, 89동 8987㎡(2,720평)의 건물이 복원됐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의 약 25% 수준에 도달하였다. 또한, 광화문 권역은 2010년 9월 이후 완전 개방되어 최근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관람하고 있다. 2차 복원사업은 2011년부터 실시되었는데, 정비사업과 장기복원으로 나뉘어 추진되고 있는데, 2030년까지 고종 당시 경복궁의 75% 수준으로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복궁 복원 기공식 행사 참고 이미지
경복궁 복원 기공식 행사(1991)
경복궁 홍례문 복원 기공행사 참고 이미지
경복궁 홍례문 복원 기공행사(1997)
신축 경복궁 근정전 참고 이미지
신축 경복궁 근정전(2003)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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