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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이자 유일한 한국방위 군사동맹 한국-미국 상호방위조약

6.25전쟁이 한창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1월 3일 중부전선 일대에서는 치열한 대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로 경기도 중북부 일원에서 아군과 적군이 맞붙어 밀고 당기는 유례없는 대규모의 공방전이 펼쳐진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1월 30일에는 피난민들의 주요 생활근거지였던 부산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났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몰려든 피난민들이 그나마 간신히 꾸려오던 생계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는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이렇게 전시(戰時)의 어려운 상황은 전후방 할 것 없이 여전히 계속되었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판문점에선 휴전회담이 속도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한국정부의 입장은 달랐다.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지만 격퇴도 승리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의 휴전은 단호히 반대했고, 뒤늦게 끼어들어 전세를 역전시킨 중공군을 겨냥해 중국본토의 해안을 봉쇄해야 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엄청난 피해와 희생을 치른 마당에 완전한 북진통일을 이룩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화근이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공산군과 유엔군 사이의 휴전회담은 한국정부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었고, 피차간에 포로교환협정까지 조인하게 되자 드디어 6월 18일에는 한국정부가 일방적으로 2만 5천 명의 반공포로 전원을 전격 석방시켜 버린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깜짝 놀란 사건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 가운데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공포로들을 일시에 풀어주는 작전을 감행, 휴전을 추진 중인 미국에 저항하는 한편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한국정부의 뜻을 전 세계에 전했다. 경악을 금치 못한 미국은 그제야 한국정부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 요구는 다름 아닌 휴전 후에 있을 지도 모를 북한의 재침에 대비한 강력한 군사동맹이었다. 우리나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벼랑끝 전술이자 생존전략이었다. 휴전을 하고 미국이 또 다시 한반도에서 물러나면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북한의 재침은 불을 보듯 빤하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참석 미국측 관계자와 악수 썸네일 이미지
이승만 대통령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참석 미국측 관계자와 악수
(1953)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썸네일 이미지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1953)
변영태 외무부장관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 서명 썸네일 이미지
변영태 외무부장관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 서명(1954)

이에 다급해진 미국은 휴전스케줄에 차질을 빚지 않으려고 우리나라의 요구를 수용하고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급기야 1953년 6월에는 미국 대통령특사가 우리나라로 와 외교적 절충을 시작했고, 8월에는 미국 국무장관과의 일련의 회담에서 우리가 원하는 한미방위조약에 대한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1953년 7월 27일 북위 38도선 부근을 새로운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휴전에 합의함으로써 겨우 전쟁 전의 상태로 복귀될 수 있었다. 전쟁 중에 극적으로 합의를 이룬 이 조약은 한미 간에 순전히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약속으로, 1953년 10월 1일에 정식조인하고 1954년 11월 18일부터 발효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군사동맹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그리고 이 동맹조약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특유의 외교적 결단과 특단의 조치로 이뤄낸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두고두고 평가되기도 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비준서 교환의 건 썸네일 이미지
한미상호방위조약비준서 교환의 건(1953)

그만큼 한국의 안보에 있어 중요한 이 방위조약은 전문과 본문 6개항과 그 밖의 부속문서로 되어 있다. “당사국 중 일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될 경우 언제든지 양국은 협의한다. 각 당사국은 상대 당사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공통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절차에 따라 행동한다. 미국은 그들의 육해공군을 한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한국정부는 이를 허락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은 그들의 군대를 우리나라 영토와 그 부근에 배치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나라가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의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즉각 개입해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 대한 북한의 공격을 용인하지 않으며, 나아가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장치를 구축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로 들어있다. 우여곡절 끝에 전쟁은 휴전상태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전쟁 억지력이나 전력 면에서 취약했다. 자신의 군사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안보불안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한 미군의 우리나라 주둔은 우리나라 방위의 핵심이었고,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데 미군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주한미군’이란 용어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6.25전쟁 중에 30만 명을 상회하던 미군은 휴전과 더불어 대부분 철수하고 1960년대 말까지는 약 6만여 명이 주둔했다. 그러다가 1971년 지상군 1개 사단과 1980년대 초 1개 여단이 철수하고, 그 후로는 약 3만 7천여 명이 남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지켜가고 있다. 하지만 이제 주한미군은 단순히 주둔 병력의 숫자로만 말할 단계가 아니다. 최첨단 무기와 막강한 전쟁능력을 갖추고 언제 또 있을지 모르는 북한의 도발에 한국군과 함께 항상 상호방위태세에 돌입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원래 한국방위는 한미연합방위체제가 기조인데도 대부분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우리나라로서는 방위에 대한 주체적 전략개념을 반영할 수 있는 기구가 없어 늘 아쉬워했었다. 그러다가 1968년부터 매년 ‘한미안보협의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연합방위체제의 운영주체로서 1978년 11월 8일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게 되었다. 한미연합사령관은 미국 측에서 맡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행사해 오다가, 1994년 12월 1일부터는 합의에 의해 전시가 아닌 평시작전통제권은 우리나라 합참의장이 행사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평시에는 우리나라 합참의장이 위임한 사항에 대해서만 한미연합사령관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

한미연합군 사령부 창설 썸네일 이미지
한미연합군 사령부 창설(1978)

6.25전쟁 중에 합의를 해서 휴전이 된 그 다음해 11월부터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동안 꾸준한 발전과 협력과 손질을 거쳐 이제는 한미연합사령부 체제까지 온 것이다. 광복 후 한미군사안전 잠정협정과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 그리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규정한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에 이어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이 정식명칭인 작금의 ‘한미상호방위조약’까지. 결과적으로 우리는 오랜 세월 미국에 안보신세를 지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어 현재도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팀 스피리트 훈련(한미연합 합동훈련) 썸네일 이미지
팀 스피리트 훈련(한미연합 합동훈련)(1982)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김학준, 『한국과 국제정치』, 박영사, 19750
  • 신동아, 『개항백년 연표 자료집』, 동아일보, 197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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