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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죽기 전에 말하라, 일본 정부여!
위안부 여성들에게 미안하다고 나에게 말하라. 나에게, 나에게, 나에게! 말하라.
미안하다고 말하라, 미안하다고."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말하라' 모놀로그 중에서)

해마다 8월 14일이 돌아온다. 하지만 그 날이 어떤 날인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991년 8월 14일. 67세의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 앞에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처음 고발한 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위안부 생존자 고백이었다. 그렇게 종전이 선언된 지 45년째 되는 해, 침묵은 깨졌다. "당한 것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일본 사람들이 정신대란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발뺌하는 것이 너무 기가 막혀 증언하게 됐다."고 할머니는 자신의 고백 배경을 설명했다. 현재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김학순 할머니는 그로부터 6년 뒤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원한 것은 일본 정부의 물질적인 보상이 아닌 진정성 있는 사과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종식된 지 70년이 흘렀지만, 김학순 할머니와 같은 아픔을 가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상태다.

우리나라는 1988년부터 위안부 조사 운동을 전개하며, 생존자의 신고를 받았다. 3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시작되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진상조사와 외교적 후속조치를 위한 여러 움직임이 급물살을 탔다. 1991년 9월 정부는 ‘정신대 실태조사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일본에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의 범죄를 입증할 자료를 찾는데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정부는 1990년까지 위안부 문제는 민간업자의 소행이었다며 일본군과 무관하다는 뜻을 고수했지만,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현 방위성)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된 위안소 관련 자료가 공개되자, 일본군의 관여를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같은 해 1월 8일, 한일정상회담을 위해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당시 일본 총리가 우리나라를 찾았다. 그의 방한(訪韓)을 기점으로 위안부 할머니들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게 됐다.

정신대 보상요구를 시위를 벌이고 있는 관계자들 참고 이미지
정신대 보상요구를 시위를 벌이고 있는
관계자들(1992)
정신대 보상요구 시위 참고 이미지
정신대 보상요구 시위(1992)
정신대 국제심포지엄 및 시위·공연 참고 이미지
정신대 국제심포지엄 및 시위·공연(1995)

그러나 일본 정부는 피해자 보상 문제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의무가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우리 정부는 1993년 위안부 생존자들을 위한 생활안정 지원금과 영구임대주택 우선 입주권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1995년 7월 일본 정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설립했다. 이 기금은 일본 정부가 법적인 책임은 회피하면서 도의적인 책임만 지겠다는 취지를 가진 것으로 피해 여성들과 시민단체는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1998년 4월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재판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1998년에도 우리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의 지원금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다. 일본에 강력하게 책임을 묻지 못하면서 우리 정부가 그 지원금을 책임져야 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었다. 1998년 그 논란은 더욱 뜨거워졌다.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우리 정부가 일시금으로 3,150만 원의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고 매월 지급되는 지원금도 50만 원으로 인상한다는 지원안이 발표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지원안의 골자가 이제는 일본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 정부가 그 피해보상을 하며, 일본 정부에게는 사과만을 요구할 것이란 취지였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국무회의에서 이 지원안은 보류되었는데, 국무회의를 주재한 김대중 대통령은 보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신속히 해결할 필요는 있으나 책임문제는 그것대로 해결해야 한다.
우리 정부의 일본 정부를 향한 배상요구, 책임 추궁 등의 대책에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종군위안부 지원금 정부지급안 각의(閣議), 논란 끝에 보류」, 중앙일보 1998년 4월 15일자 기사)

한마디로, 우리 정부가 일본을 대신해 배상을 해주는 모양새가 되는 것을 지양하겠다는 의지였다. 또한, 당시 피해 당사자와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문제 역시 함께 지적되었다.

생존 구 군대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지원금 지급에 즈음한 대변인 성명 참고 이미지
생존 구 군대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지원금 지급에 즈음한 대변인 성명(1998)

"일본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법적으로 배상하라."

2014년 6월 8일,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제 남은 생존자는 54명.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이뤄지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집회는 어느덧 22년째를 맞아, 세계 최장기 단일 집회로 기록되고 있다.

그들의 소원은 하나다.
전쟁의 상처 속에서 더 큰 아픔을 겪었던 여성들.
그녀들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진심 어린 사과가 이뤄지길 바란다.

종군 위안부 관련 미 하원 공동결의안 채택 참고 이미지
종군 위안부 관련 미 하원 공동결의안 채택(2001)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경향신문, 「일 위안부 만행 첫 증언 김학순 할머니 별세」, 1997.12.17.
  • 경향신문, 「정신대 김학순 할머니 회견」, 1991.12.7.
  •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 윤해동, 천정환 외, 『근대를 다시 읽는다 2(한국 근대 인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 역사비평사, 2006.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http://www.hermuseum.go.kr)
  • 한겨례, 「민간기금 거부하는 김학순 할머니 "원하는 건 일본 공식사죄 뿐"」, 1996.8.15.
  • 한겨례,「일본 정부에 대한 향한 배상 요구」, 19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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