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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땀으로 얼룩진 시련의 드라마  해외 인력파견

2014년 연말에 ‘국제시장’이란 국산영화가 개봉되었다. 누적관객 1,000만 명은 단숨에 돌파했고, 주로 60대 이상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울고 또 울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들이 살아온 모질고 힘겨웠던 세월이 단편적이나마 그 영화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6.25전쟁, 피난과 이산가족 말고도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두 가지의 처절한 삶의 투쟁이 가슴 아프게 펼쳐지고 있다. 서독 광부와 간호사 파견 그리고 월남전 파병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월남파병은 성격상 전쟁에 참여한 일로 해외 인력파견과는 좀 다른 사안이고, 서독 광부와 간호사 파견이야말로 명실공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이뤄진 해외 인력파견이라 할 수 있다. 훗날 또 다른 해외 인력파견인 중동건설근로자 송출 얘기는 이 영화에 미처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 서독 광부와 간호사 대목에서 사람들은 그만 울어버린 것이다. 얼마나 한이 맺히고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사연이 많았으면 그들은 가슴 속으로부터 뭉클 끓어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차마 감추지 못했을까.

돌이켜보면 그 당시 한국의 해외 인력파견은 단순한 파견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영혼을 파는 일이었다. 누대(累代)에 걸친 가난이란 유산을 벗어던지기 위해 낯선 이국땅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게임 같은 초인적인 생존의 몸부림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우리의 해외 인력파견은 크게 세 갈래로 정리된다. 서독의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의 기술자 파견, 그리고 시기적으로 조금 뒤인 중동건설현장의 근로자 송출이다. 이 모두가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 한 결 같이 목숨과 청춘과 인생을 담보로 한 자기희생의 드라마였다. 먼저 시작된 것은 서독광부와 간호사 파견이었다. 1962년부터 우리나라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살아봐야겠는데, 여전히 실업자는 넘쳐나고 당장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뾰족한 묘수는 나오지 않았다. 차관을 주겠다는 나라도 없었고, 외화도 바닥이었다. 그때 궁리 끝에 떠오른 것이 해외로 인력을 내보낼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각국에 나가 있는 대사관에 해외 인력파견을 알아보라는 훈령을 내렸고, 여기서 첫 번째로 성사시킨 곳이 서독 광부 1,500명이었다.

서독가는 젊은 광부들 썸네일 이미지
서독가는 젊은 광부들(1963)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산업을 일으켜 이미 경제적으로 부강의 길로 들어섰고, 독일근로자들은 목숨을 거는 힘든 일은 꺼리는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광부를 파견해주면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빌려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우리는 찬밥, 뜨거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1963년 부랴부랴 서독으로 떠날 광부 500명을 1차로 모집했는데, 무려 46,000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다수 포함된 고학력자들이 대부분이었다. 1963년 12월 드디어 서독파견 광부 결단식을 갖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들이 독일에서 하는 일은 지하 수백수천 미터, 수십 킬로미터의 갱도에서 목숨을 걸고 석탄을 캐는 일이었다.

파독 간호사는 그 당시 서독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던 몇몇 한국 의사들에 의해 1960년부터 개인적으로 몇 명씩 데려가고 있었는데, 1966년에 들어서 정부 차원에서 28명의 간호사를 독일로 보내게 되었다. 파독 간호사들은 말이 간호사이지 간호조무사 역할을 했다. 청소도 하고 시체도 닦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것이다.

한국 간호사 서독으로 출발, 환영 인파 썸네일 이미지
한국 간호사 서독으로 출발, 환영 인파
(1966)
한국 간호사 서독 출발 썸네일 이미지
한국 간호사 서독 출발(1966)
한국 간호사 서독으로 출발비행기에 오르는 모습 썸네일 이미지
한국 간호사 서독으로 출발비행기에
오르는 모습(1966)

1964년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서독 방문길에 나섰다. 대통령전용기는 커녕 국적기도 없어서 서독여객기를 빌려 타고 서독으로 가서는 우리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북받치는 설움에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대통령도 울고 영부인도 울었다. 가난은 그만큼 서럽고 무서운 것이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1965년에 국내로 송금한 외화는 한국 상품수출액의 10.5%를 차지할 정도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는 8,000여 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11,000여 명으로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연간 약 5,000만 달러로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무려 2%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액수였다.

한편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 즉 1960년대 중반에 최초의 한국군 월남파병이 이뤄진다. 그리고 동시에 베트남의 요청으로 우리 기술자들의 월남파견 또한 성사되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 베트남 현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수송을 담당하는 운전기사로부터 각종 건설기술자들까지 맹활약을 펼쳤다. 1964년 이후 줄곧 전쟁 중에도 베트남의 신도시 건설을 비롯한 나트랑과 하노이 간의 1번국도 확장공사를 맡는 등 파월 기술자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력 또한 눈물겨운 것이었다. 이들 기술자들이 베트남에서 흘린 땀과 경험과 노하우는 나중에 벌어지는 중동에서의 건설인력 파견으로 자연스럽게 전수되었다.

파월 기술자 식사광경 썸네일 이미지
파월 기술자 식사광경(1966)
파월 기술자, 대통령선거 부재자신고서 넣는 모습 썸네일 이미지
파월 기술자, 대통령선거 부재자신고서
넣는 모습(1967)
월남 나트랑-하노이간 1번 국도 확장공사 한국기술자 참여 썸네일 이미지
월남 나트랑-하노이간 1번 국도 확장공사
한국기술자 참여(1969)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우리는 해낼 수 있다는 끈기와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세계로 뻗어가는 우리의 기술, 우리 기술자들의 해외 취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우리나라의 한 건설사가 중동지역에 먼저 진출해 공사수주에 들어갔고, 1973년에는 처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그 후 1977년 서울에서 중동파견근로자 가족위안의 밤 행사까지 열릴 정도로 대대적인 인력송출이 이어졌다.

그리고 1979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중동현지를 시찰, 우리 근로자들을 위로하였으며, 쿠웨이트 등을 공식방문 해 정부차원의 지원활동을 펼쳤다. 이것이 이른바 ‘1차 중동건설 붐’의 서막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우리 건설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 공단의 항만공사, 가스공사, 주거단지 조성, 펌프하우스공사 등 초대형 공사들을 따내 사실상 중동건설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광활하고 메마른 사막에 기적을 만드는 한국의 해외파견인력들이었다. 그 후로도 줄곧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열사의 사막에서 누구도 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불가능한 일을 우리가 해냈던 것이다.

현대건설 중동파견 근로자 가족위안의 밤 썸네일 이미지
현대건설 중동파견 근로자
가족위안의 밤(1977)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얀부 가스공사 썸네일 이미지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얀부 가스공사
태평양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거단지 조성공사 썸네일 이미지
태평양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거단지
조성공사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은 전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한편의 대하드라마라고 했던가. 거기에는 누가 뭐래도 목숨과 열정과 청춘을 바친 우리의 해외 인력파견이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김원, 『박정희시대의 유령들』, 현실문화연구, 2011.
  • 나혜심, 『파독한인여성 이주노동자의 역사」, 서양사론,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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