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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한과 아픔을 달래주던 민족 스포츠, 프로레슬링

경제개발이 제일의 목표였던 1960∼70년대, 지금은 흔한 가전제품인 텔레비전이 한 집에 한 대 있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프로레슬링이 텔레비전 중계를 하면 동네 만화가게나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온 동네 사람이 모였다. 요즘처럼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와 같은 것이 없었던 시절에 프로레슬링은 전 국민을 흑백텔레비전 앞에 끌어 모았던 최고의 인기 종목이었고, 그 중심에는 김일 선수가 있었다. 김일 선수는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의 어려움을 잠시 잊게 해주는 프로레슬링의 최고 영웅이었다. 더군다나 프로레슬링은 경기 내용상 늘 반칙하는 사람이 나중에 패하고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승리를 거두는 권선징악의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정의의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 체구로 보면 도저히 쓰러트릴 수 없을 것 같은 외국의 거구들을 박치기 하나로 쓰러뜨리는 김일 선수의 모습을 보면서 힘들고 어려운 여건이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국민들의 마음에 심어주기도 했다. 그의 박치기는 가난했던 시절 많은 사람들에게 고단한 삶을 지탱시켜 주는 희망의 대명사 같은 것이었다.

한.미.일 프로레슬링 시합 썸네일 이미지
한.미.일 프로레슬링 시합(1961)
한국 프로레슬링 경기 썸네일 이미지
한국 프로레슬링 경기(1962)
프로레슬링 국제선수권 선발대회 개회식 썸네일 이미지
프로레슬링 국제선수권 선발대회 개회식(1963)

영원한 박치기의 영웅 김일

김일 선수가 처음부터 박치기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180cm의 장신이었던 김일 선수는 씨름판을 휘어잡다가 프로레슬러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밀항한다. 당시 일본 레슬링계 최고의 스타로 명성을 날리던 역도산(力道山)의 문하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한국이 낳은 세기의 역사 역도산은 운동신경을 타고 났을 뿐만 아니라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상대의 가슴을 치는 가라데 촙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이 기술을 바탕으로 동양타이틀, 세계타이틀을 연거푸 획득하며 세계적인 프로레슬러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힘들어 하던 일본 사회에서 역도산은 영웅이었다. 패전국 일본으로 미국 프로레슬러를 불러들여 경기 전 유리컵을 씹어 먹으며 기싸움을 펼치다 경기에서 완승을 거두는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김일 선수는 밀입국자로 일경에 체포되는 등 갖은 고초 끝에 역도산을 만나 도쿄의 역도산체육관 문하상 1기로 입문했다. 그런데, 스승 역도산은 김일 선수에게 평범한 기술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평양박치기를 배우라고 했고, 가혹한 훈련법으로 김일 선수를 훈련시켰다. 새끼줄을 감은 기둥에 수 백 번씩 머리를 박고 또 박게 했다. 날마다 골프채로 김일 선수의 이마를 때려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시험도 했다. 이마가 터져 피가 흐르고 살갗이 찢겨도 병원에 가지 못했으며,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피눈물 나는 훈련을 한 끝에 김일 선수는 1967년 4월 29일 장충체육관에서 미국의 마크 루니에게 이겨 세계레슬링협회(WWA : World Wrestling Association) 세계챔피언이 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김일 선수는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극동헤비급챔피언, 도쿄 올아시아 태그챔피언 등 20여 개의 세계타이틀을 보유하며 세계 최고의 프로레슬러로 등극했다.

[대한뉴스 제551호] 김일 선수 프로레슬링 경기
[대한뉴스 제551호] 김일 선수 프로레슬링 경기(1965)

암울하고 힘든 시절 박치기 하나로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했던 김일 선수의 등장은 천규덕, 장영철 등 굵직한 국내 프로레슬러들과 함께 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의 황금시대를 열게 되었다.

사각의 링 프로레슬링

프로레슬링은 프로페셔널 레슬링(professional wrestling)의 약칭이다. 프로레슬링이 일반 레슬링과 비슷한 것은 네 활개를 펴고 엎드려서 수비하는 자의 옆에서 공격을 하는 그라운드 기술, 항복을 받아내는 주짓수, 암바 등의 서브미션이 있다는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미국에서 축제가 열릴 때 기획자들이 레슬러들의 경기를 열어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 프로레슬링의 시작이었는데, 이때는 현재의 프로 복싱과 비슷하게 레슬러들이 대전료를 받고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이나 캐치 레슬링 등으로 실전 경기를 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경기가 길고 지루해 사람들의 흥미가 떨어지자 경기 길이와 내용을 미리 짜 두는 등 현재의 프로레슬링과 비슷하게 바뀌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으나, 현재는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 미국의 프로레슬링 단체)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프로레슬링이 각본 하에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는 경기 내용 전체를 미리 구성하는 프로레슬링 승부작가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이렇듯 프로레슬링은 순수 스포츠가 아니라 쇼적인 요소의 비중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프로레슬링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프로레슬링을 매트쇼 또는 스펙테이터 스포츠(spectator sports) 등으로 부른다. 1950년대 미국 프로레슬링은 텔레비전의 보급과 맞물려 최대의 황금기를 맞았다.

[대한뉴스 제319호] 프로레슬링 경기
[대한뉴스 제319호] 프로레슬링 경기(1961)

우리나라의 레슬링은 1960∼1970년대 황금기였다. 김일 선수가 국내로 복귀했던 1965년 이미 국내에서는 장영철 선수가 불모지와 같은 우리나라 레슬링계를 이끌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장영철 선수의 손을 거쳐 무려 백 명이 넘는 선수가 배출되었고, 그 자신도 69연승을 달리며 우리나라의 프로레슬링계를 이끄는 에이스였다. 백드롭의 명수였던 장영철 선수, 당수의 달인이었던 천규덕 선수, 알밤까기의 달인이었던 여건부 선수,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김일 선수까지 합세해 우리나라 레슬링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역도산이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던 일본 사회의 희망으로 등장했던 것처럼, 김일 선수와 장영철, 천규덕 선수 등은 6.25전쟁 이후 힘든 시기를 보내던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일본 레슬러들을 차례로 꺾으며 우리 국민들의 속을 후련하게 해주었다. 이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1964년 5월 20일 한 만화가게 2층 방에 무려 60여 명이 모여 있다가 2층 바닥이 내려앉아 19명이 다치는 일까지 있었으니, 이들의 인기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기를 끌던 프로레슬링은 1965년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대회에서 난투극을 벌인 장영철 선수가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레슬링은 쇼’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변화의 조짐을 맞게 된다. 이후 프로레슬링계의 내분과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 등 프로스포츠의 탄생으로 프로레슬링은 점차 쇠퇴기를 맞게 된다.

김일, 장영철, 천규덕 등 1세대 레슬러들의 활약으로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프로레슬링, 지금은 그들의 뒤를 이어 이왕표, 김도유, 노지심 등 2세대 레슬러들이 제2의 중흥기를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집필자 : 황은주)

참고자료

  • 네이버지식백과(http://terms.naver.com)
  • 네이버캐스트 「당신은 프로레슬링스타」(http://navercast.naver.com)
  •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 한겨레신문, 「사양길 프로레슬링……. 쓸쓸한 명맥」, 1991.3.26.
  • 문화일보, 「장영철 ‘프로레슬링은 쇼’발언 기사는 완전 오보였다」, 2010.9.10.
  • 조선일보, 「김명환의 시간여행(3) 3,000만이 흥분한 60년대 프로레슬링……. 대통령, 중계 보려 정치 회동도 늦춰」, 201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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