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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갯벌을 메워 하늘을 날다. 국제공항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는데도 한 마디 말 못하고 헤어지는 당신을
이제 와서 붙잡아도 소용없는 일인데 구름 저 멀리 사라져간 당신을 못 잊어 애태우며
허전한 발길 돌리면서 그리움 달랠 길 없어 나는 걸었네.”

1970년대 초에 유행하던 ‘공항의 이별’이란 대중가요의 가사다. 이 노래에 이어 ‘공항대합실’, ‘공항에 부는 바람’ 등 그 무렵을 전후해 공항과 관련된 노래는 몇 곡 더 유행했다.

이렇듯 197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있어 공항은, 특히 국제공항은 단지 외국으로 떠나는 이별장소로서의 이미지로만 존재했다. 짙은 색깔의 선글라스 정도가 공항패션의 전부였고, 국산 신파멜로 영화들은 으레 주인공 어느 한쪽이 국제선 여객기 트랩에 올라 손을 흔들고 기내로 사라지는 장면으로 마무리 하곤 했다. 김포공항 송영대(送迎臺)에선 그 여객기가 ‘구름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눈물지며 돌아서는 수법이 상투적이었다. 주로 이 땅을 등지고 이민을 떠나거나, 유학을 가거나, 해외입양을 하거나,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떠나가던 곳이 국제공항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쭉 뻗은 ‘김포가도(街道)’를 택시를 타고 달리는 장면이 국산영화에 자주 등장했다. 언제쯤 저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날아볼까?

그러나 그 꿈은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김포공항을 이용하는 여객과 항공화물이 급격히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기업을 꿈꾸는 재계와 산업계에서 해외에 지사나 종합상사를 내고, 이 때문에 드나드는 외국인들도 차츰 늘어나기 시작한다. 동시에 수출 물동량도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다. 여객 못지않게 항공화물에도 비중을 둬야하는 시기가 온 것이었다. 이른바 중동특수 붐을 따라 해외로 송출되고 귀국하는 근로자들도 공항을 이용했다. 그곳이 바로 김포국제공항이었다.

김포공항의 역사는 우리 항공시대의 역사다. 원래 김포공항 자리는 1939년 일제강점기 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 ‘가미가제 특공대’가 비행장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1942년에 김포비행장으로 개설되었고, 광복 후 미군이 사용하다가 1949년 한국과 미국 사이에 운영협정이 체결되었지만 6.25전쟁으로 대부분의 비행장 시설이 파괴되었다. 전쟁 중에는 국제연합군사령부 관할의 군용비행장이었고 1957년에 긴급보수공사로 그중 일부가 국제공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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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항공(1957)

그리고 1958년 당시 여의도비행장을 흡수하면서 비로소 김포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지정되었고, 1961년에 와서야 그 관리권이 우리나라로 이양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김포공항이 본격적인 국제공항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사실상 1971년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확장과 현대화를 거듭하면서 화물청사와 국제선 제2청사까지 갖추어 드디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게 되었다.

올림픽이 임박해지자 세계 각국 선수들과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비행기가 하루 종일 거의 1분에 한 대 꼴로 김포국제공항에 내려앉았다. 실로 아슬아슬하고 버겁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한국은 이미 세계 속의 중심국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일취월장 발전하는 국력과 경제규모에 따라 한국을 찾는 국제여객기는 포화상태를 이루고, 김포국제공항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단계가 되자 급기야 정부에서는 신공항 건설계획을 세우고 부지 물색에 들어갔다. 물론 그 사이에 부산의 김해국제공항도 활발히 사용됐고, 관광객을 염두에 둔 제주국제공항도 확장됐지만 역부족이었다.

부산국제공항 시설확장 및 녹지대 정비 썸네일 이미지
부산국제공항 시설확장 및 녹지대 정비(1970)
제주국제공항 확장계획 썸네일 이미지
제주국제공항 확장계획(1978)
김포국제공항 청사 개관 썸네일 이미지
김포국제공항 청사 개관(1960)
영종도 신공항 기공식 썸네일 이미지
영종도 신공항 기공식(1992)
청주국제공항 개항식 썸네일 이미지
청주국제공항 개항식(1997)

국제공항으로서의 처리능력이 곧바로 국력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이었다. 기왕에 신공항을 만들 바에야 글로벌 허브공항으로, 공항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되는 세계 초일류 공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때 벌써 세계 각국의 국제공항들은 그 규모나 운영 면에서 엄청난 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기존의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공항은 물론이고 일본과 홍콩과 싱가포르까지 놀랄만한 규모의 신공항사업에 뛰어든 상태였다.

1990년 드디어 서해 인천 앞바다 영종도 신공항 건설계획이 발표된다. 영종도를 비롯한 기존의 섬들과 그 사이의 넓은 갯벌을 메우는, 다시 말해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들고 그 위에 국제공항을 세운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바다와 갯벌을 흙으로 채워 거대한 공항 부지를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듯 ‘상전벽해(桑田碧海)’ 그것이었다. 1992년 드디어 영종도 일대에 수도권 신 국제공항이 들어설 기공식이 열리고 대 역사의 첫 삽을 떴다.

그 사이 제주국제공항 활주로가 확장되었고, 1997년에는 청주국제공항도 문을 열었다. 바야흐로 전국 규모로 국제공항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김포국제공항 하나에 거의 의존하다시피 하던 1980년대를 지나고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항공시대를 향한 우리의 꿈은 무르익어 갔다.

건설계획 발표 : 영종도 신공항 썸네일 이미지
건설계획 발표 : 영종도 신공항(1990)
영종도 신공항부지 조성공사 썸네일 이미지
영종도 신공항부지 조성공사(1993)

그렇게 한 세기가 가고 새로운 한 세기가 시작된 2001년 3월 29일 인천국제공항은 개항되었다. 1992년 방조제 공사를 시작한지 9년만이었다. 영종도 신공항 또는 수도권 신공항으로 불리면서 그 규모나 기능에서 실로 어마어마한 공사를 끝낸 새 공항의 정식이름은 ‘인천국제공항’. 인천광역시 중구 공항로 271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대의 국제공항으로, 그때부터 대한민국을 찾는 대부분의 국제선은 이곳을 통해 드나들게 되었다. 바다와 갯벌을 흙으로 메운 기적의 땅에서 연일 각국 항공기들의 이착륙이 이뤄졌다. 사실상의 해상공항이기 때문에 내륙공항인 김포와 달리 24시간 운항이 가능했다. 2014년 현재 국제선의 여객처리 능력은 세계 8위. 2, 3차에 걸쳐 청사를 추가로 늘리는 공사가 완료되었거나 현재도 진행 중이다. 2005년 이후 ‘세계공항서비스평가’에서 내리 10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연간 4,400만 명 이상의 여객이 인천공항을 이용한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다. 엄청난 여객과 화물처리로 인천국제공항은 밤낮이 없고 전 세계 항공기들의 허브공항이 되었다. 국제공항의 개념을 바꾸고 수준을 몇 단계나 훌쩍 업그레이드 시켰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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