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꽃으로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무궁화에 대한 언급은 고조선까지 거슬러 반만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대 중국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군자의 나라에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더라.”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 효공왕 원년(897년)에 당나라 광종에게 보낸 국서에서는 스스로 무궁화를 뜻하는 '근화향(槿花鄕)'이라고 자칭하였는데, 이에 관해 중국 당나라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에 “신라가 보내온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槿花鄕),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홍직의 『국사대사전』에는 "무궁화는 구한말부터 우리나라 국화로 되었는데, 국가나 일개인이 정한 것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를 예부터 '근역(槿域)' 또는 '무궁화 삼천리'라 한 것으로 보아 선인들도 무궁화를 몹시 사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무궁화는 법령으로 표시하지 않았으나, 예로부터 민족에게 사랑받아온 통념의 국화(國花)로 알려져 있다.
구한말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Richard Rutt)가 쓴 『풍류한국』에 보면 “프랑스, 영국, 중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꽃은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꽃이 전체 국민의 꽃으로 정해졌으나, 우리나라의 무궁화만은 유일하게도 황실의 이화(李花)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졌으며, 무궁화는 평민의 꽃”이라고 쓰고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과 무궁화를 결부시켜서 이야기한 것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고, 1896년 독립협회가 추진한 독립문 주춧돌을 놓는 의식 때 부른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내용이 담겨질 만큼 은연 중 무궁화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다.
예부터 무궁화는 나라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해 왔다. 신라 화랑의 원조인 국자랑은 머리에 무궁화를 꽂고 다녔다. 조선시대 장원급제자 머리에 꽂은 꽃도 무궁화였고, 혼례 때 입는 활옷에 무궁화 수를 놓아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다. 1945년 광복 이후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하면서 국기봉을 무궁화로 사용하고, 정부와 국회의 표장도 무궁화 도안을 사용하면서 나라꽃(國花) 무궁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최고의 훈장이 무궁화대훈장인 것을 비롯해, 통신위성에도 무궁화의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입법·사법·행정 삼부의 표상으로 국회의원의 배지(Badge), 법관의 법복, 경찰의 모표와 계급장, 호텔의 등급을 나타내는 표상으로도 쓰인다.
2001년 한국은행이 50주년 창립기념으로 화폐박물관을 설립하면서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화폐'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화폐의 뒷면 도안 소재로 가장 많이 추천된 것이 바로 무궁화였다. 이렇듯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상징꽃으로 국민들의 마음속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문화말살은 우리 겨레의 꽃 무궁화 말살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은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조상대대로 사랑하고 지켜온 무궁화를 보이는 대로 뽑아버리고 불태웠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강원도 홍천 보리울의 무궁화동산사건이 있는데, 지금의 무궁화공원이 들어선 이곳은 한서(翰西) 남궁억의 고향이기도 했다. 남궁억은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애국지사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서울을 떠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 마을로 내려와 그의 나이 60세에 초등학교를 설립했다. 남궁억은 무궁화를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 나라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학교 뒤뜰에 7만 그루의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몰래 나누어주기 시작하였고, 무궁화 노래를 지어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그러던 중 1933년 11월 2일 홍천경찰서 사법주임인 신현규가 조사원을 가장하여 남궁억을 방문했는데, 남궁억은 신현규를 무궁화 묘포로 데리고 가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라는 것을 설명하며 ‘사쿠라는 활짝 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면연이 피어나는 것처럼 한국의 역사가 영원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 일로 남궁억은 체포되었으며 보리울 학교도 폐쇄되고 무궁화동산은 불살라진 사건이 바로 ‘무궁화동산사건’이었다.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를 없애기 위해 무궁화에 대한 악선전을 일삼았다. 특히 ‘눈병 나는 꽃’이라며 무궁화를 보고 만지면 그 꽃가루가 눈으로 날아와서 눈에 핏발이 서고 병이 난다고 하였다. 또 ‘부스럼꽃’이라 하여 무궁화 꽃가루가 살갗에 닿으면 부스럼이 생긴다며 무궁화를 왜곡 날조하여 우리나라 곳곳에 심어져있던 무궁화를 짓밟고자 했다.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은 연설 때마다 ‘무궁화동산’이라는 말을 하면서 “무궁화를 사랑하자”라고 외쳤다.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우리 조상들은 나라사랑에 대한 증표로 무궁화를 심었고, 이로 인해 투옥되거나 고문을 받기도 한 것이다.
‘무궁나라’라는 민간단체는 2007년,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지정했다. 8자를 옆으로 뉘면 ‘무한대(∞)’가 되어 무궁(無窮)을 상징하고 이즈음에 무궁화가 만개하기 때문에 이날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애국가의 후렴구가 무색하게 무궁화는 잘 보이지 않는 꽃이 되어버렸다. 2015년 현재, 전국의 벚꽃축제는 10개나 되는데 비해, 무궁화축제는 강원도 홍천의 ‘나라꽃 무궁화 축제’ 딱 하나로 나타났다. 2014년 현재 전국 지자체가 가로수로 심은 수종을 조사한 산림청 자료에서는 무궁화 식재율은 5.6%로 5위에 그친데 반해, 벚나무가 140만 그루(식재율 23.5%)로 가장 많았다.
무궁화는 이름만 나라꽃일 뿐 우리나라에서 찾기 힘든 꽃이 되어버린 셈이다. 일각에서는 무궁화를 국화로 명문화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무궁화의 보급 및 관리를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본격적인 논의는 미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