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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레포츠시대를 연 신(神)의 한 수  프로야구

스포츠가 돈이 되고, 스포츠로 돈을 벌고, 스포츠로 먹고 살고, 스포츠가 문화가 되는 시대가 과연 올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스포츠를 직업으로 삼는 프로가 가능한가. 먹고살기에 급급해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목표가 최우선 급선무였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 야구는 1970년대까지 사실상 고교야구가 장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주요 언론사들이 주관하는 황금사자기, 청룡기, 봉황대기, 그리고 대통령배고교야구 등이 열릴 때마다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올해는 어느 고등학교가 우승을 할까. 야구를 전혀 모르는 시골 촌로들까지 나무그늘에 모여앉아 그 지방 출신 고등학교가 무슨 고교야구대회에 나가서 결승에 진출했느니, 이겼느니 졌느니 하면서 연일 화제 거리로 삼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

황금사자기 쟁탈 고교야구대회 썸네일 이미지
황금사자기 쟁탈 고교야구대회(1972)
고려대와 연세대 야구경기 썸네일 이미지
고려대와 연세대 야구경기(1978)

물론 이때의 고교야구는 어디까지나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대회였다. 돈과 연관된 직업적인 야구가 아니라 학교의 명예를 걸고 승부를 펼치는 모습이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다. 그런데 이 아마추어스포츠에 불과했던 한국야구를 정부가 앞장서 프로화하겠다는 의지를 내세운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의 프로야구는 미국과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869년에 최초의 프로야구팀을 창단해 1876년에는 내셔널리그를 탄생시켰고, 뒤이어 1900년에 아메리칸리그까지 탄생시키면서 프로야구의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당시 미국문화라면 뭐든 따라하던 일본은 1934년에 프로야구를 출범시켜 온 일본 국민들의 열광 속에 그 상업적인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그 프로야구를 일찍이 정부에 앞서 우리나라에 들여오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1976년에 재미실업가 한 사람이 자칭 ‘한국프로야구준비위원회’라는 기구를 결성해 8명의 준비위원들과 활약하다가 그 당시 정부와 대한야구협회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부주도로 그때의 불씨를 새롭게 되살려 역사적인 한국프로야구시대를 열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달랐다. 먼저 1981년 5월에는 MBC문화방송이 창사20주년 기념사업으로 프로야구팀 창설에 앞장섰고, 그 해 12월 11일에는 ‘한국프로야구위원회’를 정식발족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제5공화국의 정책적 배려에 의해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유창순 국무총리 한국프로야구 개막 전야제 치사 썸네일 이미지
유창순 국무총리 한국프로야구 개막
전야제 치사(1982)
전두환 대통령 프로야구 개막식 시구 썸네일 이미지
전두환 대통령 프로야구 개막식 시구
(1982)
프로야구 개막식 각 팀 모습 썸네일 이미지
프로야구 개막식 각 팀 모습(1982)

출범 당시의 프로야구팀은 서울을 근거지로 하는 MBC청룡과 부산과 경남을 본거지로 하는 롯데자이언츠, 대구와 경북의 삼성라이온즈, 광주와 전라도의 해태타이거즈, 대전과 충청도의 OB베어스, 인천과 경기 강원도를 본거지로 하는 삼미스타즈 등 6개 팀이었다. 모두 지역연고를 두었고 MBC와 굵직한 기업들이 팀을 만들어 운영했다. 드디어 1982년 3월 27일 역사적인 한국프로야구 개막경기가 막을 올렸다. 그날 서울의 동대문야구장에서는 당시 대통령의 시구와 함께 MBC청룡과 삼성라이온즈의 개막전으로 한국프로야구는 시작되었다.

프로야구 초기 출발 무렵에 동원된 선수와 감독 등 인적자원은 당연히 그동안 인기를 끌었던 아마추어 고교야구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선수로는 김재박, 이만수, 최동원, 선동렬, 박철순 등 고교야구의 전설적 스타들이 주축을 이뤘고, 역시 고교야구 출신으로 일본에서 활약하던 백인천 등이 감독으로 돌아와 창단 팀을 이끌었다. 한국프로야구 첫해의 우승팀은 OB베어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OB베어스’를 포함한 여러 팀들이 이름이 바뀌거나 연고지가 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야구의 등장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아마추어 고교야구의 인기는 점점 시들해졌다. 프로야구는 새롭게 탄생하는 팀도 생겨나고 전체 팀 숫자가 늘어나기도 했으며, 구단주가 변경되는 팀도 여럿 나왔다. 1983년에는 야구를 소재로 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까지 나와서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 프로야구 붐을 일으키는데 힘을 보탰다. 물론 이 만화는 훗날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한국야구의 대표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프로야구 코리언시리즈 6차전 썸네일 이미지
프로야구 코리언시리즈 6차전(1982)

이렇게 시작된 한국 프로야구는 처음부터 각 구장마다 야구팬들로 꽉꽉 찼다. 처음에는 주로 해당 구단의 기업체 등에서 동원된 인원이 주축을 이루다가 연륜이 쌓이면서 프로야구를 즐기려는 순수한 팬들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야구장은 거의 매일 만원이었다. 지역을 연고로 하다 보니 홈팀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각자의 선호도와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팀을 정해 열심히 쫓아다니는 야구팬들도 점점 늘어났다. 날이 갈수록 프로야구가 국민들의 중심화제로 떠올랐고 마치 국민적 레저스포츠의 대명사인양 일반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기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홈팬들의 극성도 나타났다. 어린 아이를 안고 가족끼리 야구장을 찾는 팬들은 예사고, 각 팀의 모자나 유니폼 또한 불티나게 팔렸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야구모자는 이미 전 세계에 고급 제품으로 팔릴 정도로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산업으로 발전하였다. 숱한 야구스타들이 배출됐고, 그들 중에는 미국이나 일본 등 국외로 진출해 맹활약을 펼쳐 국위를 선양하거나 거액의 돈을 벌어들이는 선수들도 생겨났다. 박찬호, 이승엽, 추신수, 류현진, 이대호, 김병현, 강정호, 이종범 등이 미국이나 일본에서 뛰었거나, 다시 국내로 돌아와 계속 뛴 선수들이다.

한때 해외로 나간 선수들의 게임이 중계방송될 때는 상대적으로 국내 프로야구가 위축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세 회복세로 돌아서 모든 구장이 팬들로 넘쳐나고 한국 프로야구는 명실상부한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프로야구의 성공은 축구나 배구, 농구, 골프 등의 프로스포츠 시대를 활짝 열게 한 계기가 되었다.

(집필자 : 신상일)

참고자료

  • 이만열, 『한국사 연표』, 역민사, 1985.
  • 전완길 외 공저, 『한국생활문화 100년』, 도서출판 장원, 199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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