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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의 잔재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 시작한 것도 역사를 바로 잡아 민족정기를 확립하기 위한 것입니다. [역사바로세우기]의 참뜻을 이해하고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 드립니다.”(1996년 1월 9일 ‘새해 국정운영에 대한 대통령 연설’ 중에서)

새해 국정운영에 관한 대통령 연설-「역사바로세우기」와 「삶의 질」 개선으로 일류국가 기틀 마련 참고 이미지
새해 국정운영에 관한 대통령 연설-「역사바로세우기」와 「삶의 질」 개선으로 일류국가 기틀 마련(1996)

조선총독부 건물과 한국 현대사

최근 광화문과 경복궁은 조선시대 그대로의 규모는 아니지만, 비교적 조선의 법궁이었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정도로 궁궐 모양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고 경복궁 앞에는 1920년대 지어진 석조건물이 무겁게 버티고 있었다. 중장년층 세대들은 이 건물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부청사나 박물관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 처음 용도는 조선총독부 청사였다.

일본 식민통치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부러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을 가로막고 세워졌다. 이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철거되지 않고 50여 년 간 여러 용도로 이용되다가 1995년에 비로소 철거되었다. 식민지의 역사의 상징이자 광복 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요 무대이기도 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시작과 용도변경, 그리고 철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어떠했을까?

조선총독부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으로부터 1945년의 광복 때까지 35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일본의 통치기관을 말한다. 이 치욕적인 통치기관의 청사가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세워진 것은 언제일까? 조선총독부는 처음에는 남산 왜성대(矮城臺)에 1907년 지은 통감부 청사를 청사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사무 공간의 부족을 이유로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한 터에 신청사를 건립하였다. 원래는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자리와 현 시청 자리가 물망에 올랐지만. 초대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경복궁 앞을 고집했다고 한다. 이는 다분히 모욕적인 위치 선정이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인 경복궁을 훼손하다 못해 그 궁궐의 정면을 막아서고 고압적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웠다는 것은 일본이 한반도의 통치자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준공과 함께 광화문은 경복궁의 동쪽으로 이전되었고, 청사 앞에는 광장이 조성되었다. 이때 이전되었던 광화문이 다시 경복궁 앞으로 돌아온 것은 1960년대의 일이지만, 그때도 여전히 조선총독부 청사는 사라지지 않고 건재했다.

조선총독부 청사 항타공사 참고 이미지
조선총독부 청사 항타공사(연도미상)
중앙청 전경 참고 이미지
중앙청 전경(1945)
파괴된 중앙청 내부수리 현황 참고 이미지
파괴된 중앙청 내부수리 현황(1962)

광복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 자주 등장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조선총독부 청사를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이 건물은 캐피탈 홀(Capitol Hall)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이를 한국어로 변역해 ‘중앙청’ 이라고 불렀다. 1948년 5월 31일에 중앙청에서 제헌국회를 개의하였고, 1948년 8월 15일에는 중앙청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6.25전쟁 중에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이를 청사로 사용하였다. 북한군은 퇴각하면서 중앙청에 불을 질렀는데 이로 인해 내부가 피해를 입었다. 1962년에서야 서양식 정문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옛 자리에 복원하였다.

중앙청은 주요 행정부처가 자리를 잡아 중앙행정관청으로서 기능하여, 권부(權府)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종합청사가 세워지고 행정기관 일부가 과천 등으로 이전하면서 권부의 상징 이미지는 점차 퇴색되었다. 또한 일제 침략의 상징적 건물이기 때문에 주요 정부기관의 집무실로 사용할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중앙청 건물은 보수를 거쳐 1986년 6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역사바로세우기와 총독부 건물의 철거

그러나 아무리 용도를 변경하였다 하더라도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앞에 버티고 있다는 점은 변함없었고 그것이 나라의 보물을 보관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용도로 쓰인다는 것도 국가적 자존심과 국민감정에 좋지 않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총독부 청사 철거 논의는 6.25전쟁 중 서울 수복 이후에도 있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이 경제사정이 대규모 건물을 해체할 여력이 없었기에 유야무야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는 1990년 경복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논의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루어졌다. 1993년 8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하라고 지시했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계획 참고 이미지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계획(1996)

이에 1994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치욕적인 역사를 씻어내자는 측에서의 완전 철거 주장과 뼈아픈 역사를 뒤풀이하지 않기 위한 반면교사로서 역사적 증거로 보존하자는 논쟁이 일어났다. ‘완전철거론’과 ‘현상보존론’, ‘이전복원론’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신한국 창조와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웠던 당시 정부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결정했다. 철거 시점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 8월 15일로 정해졌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식 축하공연 참고 이미지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식 축하공연
(1995)
경복궁 앞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잔해 참고 이미지
경복궁 앞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잔해
(1996)
보수공사 중인 근정전 앞의 철거현장 참고 이미지
보수공사 중인 근정전 앞의 철거현장
(1996)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중앙돔의 해체를 시작으로 70년간 우리 땅에 버티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철거에 들어갔다. 1996년 11월 13일 조선총독부 건물의 지상 부분 철거가 완료되었고, 1998년 8월 8일 독립기념관은 중앙돔과 건축부재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개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집필자 : 김정미)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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