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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와 함께 한 우리의 옷

한복은 우리 민족의 사상, 관습, 행위, 기술 등 양식과 정신이 깃든 우리의 고유 의복이다. 한복은 치마, 저고리, 바지, 두루마기에 조끼, 마고자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식 옷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한테는 오로지 한복만이 존재했다.

우리의 옷 한복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 백제의 유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국 조나라 무령왕은 우리의 저고리인 유(襦)와 바지인 고(袴)를 군복인 융복에 빌려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할 때 입고 간 저고리, 치마, 바지, 두루마기 등이 전해졌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한복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 한복패션쇼
  • 한복패션쇼
    (1995)
  • 한복 입는 날 선포식 및 한복발전 세미나
  • 한복 입는 날 선포식 및 한복발전 세미나
    (1996)
  • 왕과 왕비의 전통예복
  • 왕과 왕비의 전통예복
    (1996)

한복의 변천사

고조선시대 한복에는 칡과 삼으로 짠 옷감을 사용하였고 누에치기와 직조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의류문화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기술력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분벽화를 통해 삼국시대 우리 의류문화의 발전상을 알 수 있는데 대체로 저고리인 유(襦), 바지인 고(袴)와 치마인 상(裳), 두루마기와 같은 포(袍)를 중심으로 한 복장이 되었으며, 여기에 머리에 쓰는 관모(冠帽), 허리에 두르는 대(帶), 발에는 화(靴) 또는 이(履)가 첨부되어 한복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졌다. 이 골격은 그대로 이어져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길이나 폭, 형태 등에서 조금씩 변화를 가져왔다. 삼국시대의 저고리는 허리정도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남녀 구분 없이 입었다. 삼국시대의 치마는 주름이 밑단까지 잡힌 주름치마와 여러 쪽을 이어 만든 색동치마가 있었으며 밑단에 선을 댄 치마도 있었다.

고려시대 한복의 특징 중 하나는 옷의 길이에 있다. 저고리가 길면 치마의 길이는 짧았고, 저고리가 짧으면 치마의 길이는 길었다. 특히 고려시대 말기 원나라의 부용국이 되면서 복식에서도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로 인해 짧은 저고리가 유행하고 띠 대신 고름을 달았다. 또 몽골의 ‘고고리’라는 것이 이때 우리나라에 전해져 ‘족두리’가 되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복식에서도 계층적 신분 질서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조선 초 치마의 경우 명나라의 치마와 거의 유사한 스란치마가 유행이었는데 이는 신분계층이 높은 사람들만 입을 수 있었다. 조선 중기부터는 남성과 여성복 모두 대체적으로 등길이가 길어 허리 밑까지 내려올 정도였으나 이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졌다. 18세기 저고리는 거의 가슴을 덮지 않을 정도로 짧아져 허리띠를 높이 착용해야 했다. 치마의 경우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길고 풍성한 느낌이었으나 17세기와 18세기에는 유독 길어지고 폭도 넓었다. 또한 종 모양처럼 엉덩이 부분만이 살짝 부푼 모습을 띄었다. 19세기에는 무릎과 발목 주변으로도 풍성해져 뒷모습이 거의 삼각형 모양의 치마가 되었으며 이는 현재에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유교이념이 더 강화되면서 여자들의 복식에 제재가 있었다. 마음껏 외출조차 할 수 없었던 여자들은 그나마 외출을 할 때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장의와 쓰개치마를 이용하였다.

1887년 청에 납치되었던 흥선대원군은 만주에서 귀국할 때 청나라 옷이었던 마괘를 입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저고리 위에 덧입는 마고자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마고자를 입고 추운 북부지방의 기후를 견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금방 퍼졌다. 조끼의 경우에는 1880년대 이후 양복의 영향을 받아 주머니가 없는 한복의 단점을 보완해 주머니를 단 조끼가 유행했다. 1897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후 우리나라에는 서구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의생활에도 변화를 가져와 양복이 들어왔으며 이때부터 한복과 양복을 혼용해서 입었다. 여성들의 옷차림에도 변화가 왔는데 짧은 통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어 개량한복의 시초가 되었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여성을 억압했던 장의와 쓰개치마에 대한 폐지 운동도 전개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한복과 양복은 공존하였는데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급속한 경제개발 및 서구식 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한복은 점차 우리의 주변에서 자리를 잃어갔다.

한복의 생활화 한복의 생활화 한복의 생활화 한복의 생활화 한복의 생활화
[대한뉴스 제1268호] 한복의 생활화(1979)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고유의 옷

이제 한복은 일상에서 입는 옷이 아니라 결혼식이나 잔치 같은 특별한 날에만 입는 특별한 옷이 되었다. 한복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였다. 당시는 경제적 안정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국제적인 문화교류도 증가하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졌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등을 전후로 해서 한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우리 옷 입기 운동’도 전개되었다. 또한 여러 단체들도 한복 입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졌다. 이때의 한복은 전통적인 형태 그대로가 아니라 모양을 단순화하고 실용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착용하기 편한 생활한복으로 만들어졌다. 기존 한복과 달리 저고리의 고름이 착용에 용이하도록 단추로 대체됐고 부피가 큰 치마를 서양식 의복과 접목하여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또 두루마기의 깃을 올려 외투와 같은 형태를 취했으며 소매도 짧게 디자인 해 한복의 불편한 점을 개량해 입었다.

  • 돌담길 한복 입은 어린이들
  • 돌담길 한복 입은 어린이들
    (1980)
  • 한복을 입고 널뛰는 아이들
  • 한복을 입고 널뛰는 아이들
    (1985)
  •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주한 외국인들
  •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주한 외국인들
    (1989)

1990년대에는 생활한복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퍼져 패션 아이템으로 수용되기도 했으며 이를 교복으로 채택하는 학교도 생겨나 한복이 대중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또한 1997년에는 한복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한복의 우수성과 산업적,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10월 21일을 ‘한복의 날’로 정했다. ‘한복의 날’에는 한복의 아름다움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최근 관광지 등에서 한복을 입은 관광객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외국인들도 한복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이들의 한복 착용이 대여라는 형식을 취해 한복 수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한복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집필자 : 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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