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역사는 흐른다. 역사는 변화한다. 역사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하면서 살아서 움직인다고 했던가. 그래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방이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도 되며,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는 남북한의 관계는 달랐다. 어제도 오늘도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적대관계 그대로였다. 해방 이후 남북으로 갈라져 6.25전쟁을 치르고, 그 후로 다시는 결코 서로 손잡을 일이 없을 듯이 하면서 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몹시 상기된 표정으로 텔레비전카메라 앞에 섰다. 그때만 해도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장이 백주 대낮에 불현듯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는 실로 놀라운 발표문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같은 시각 북쪽의 평양에서도 똑같은 성명을 발표하고 있었다.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리하여 제2부수상 박성철이 동시에 읽어 내려갔다. 김영주가 누구인가. 북한의 주석 김일성의 동생이다.
역사적인 이 순간, 이것이 바로 ‘7.4남북공동성명’이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이는 쌍방이 합의를 본 남북공동성명 가운데 제1항이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에 관한 것으로, 모두 7개 항목의 공동성명을 읽어내려 가는 사이, 사람들의 입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중앙정보부라면 당연히 대북한관계, 국가안보와 반공이 주 임무인데, 그 기관의 수장인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적진(敵陣)인 북한을 오가며 합의한 사안이라는 데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욱이 그로부터 불과 3년 전인 1969년에는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북한의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일당을 내려 보낸 북한이 아니던가. 그때 우리 정부는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라면 보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조용히 남북한을 오가면서 드디어 분단 이후 역사상 최초로 통일관련 합의까지 이끌어냈단 말인가. 그것도 간첩 잡는 이쪽의 정보부장이 주역이었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기가 막힌 반전(反轉)드라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역사는 살아있고, 흐르고, 변화한다고 했던가. 실제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에서 처음 김일성을 만나려고 밤중에 차를 타고 숙소를 나섰을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간이 오그라드는 듯했었다는 후일담도 있었다. 물론 그간에 몰래 서울을 오간 북측의 박성철 제2부수상도 비슷했을 테지만, 이런 정책적 변화는 사실은 1971년 11월 20일부터 1972년 3월까지 판문점 남북적십자 실무자들을 통해 진행되어 왔었다.
이 ‘7.4남북공동성명’에는 통일원칙 외에도 획기적으로 진전된 몇 가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상호 중상비방과 무력도발 금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실시, 적십자회담 협조, 남북직통전화 개설, 이 합의사항들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동의했다. 그리고 또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를 열고 한반도 평화정착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문서라는 데도 그 의의가 컸다.
이 성명이 나오기 전인 1970년 8.15경축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몇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북한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포기한다면,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고, 남북한의 체제 중 어느 쪽이 더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언급했다. 여기서부터 대화의 물꼬가 트여 남북한은 1972년 8월까지 모두 25차례에 걸친 적십자예비회담을 개최했고, 곧 이어 1972년 8월부터 1973년 7월까지는 모두 7차례의 적십자본회담을 열었다.
여기다가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정치문제를 다루기 위한 남북조절위원회까지 만들어졌으니 모처럼 남북관계는 순풍에 돛 단 듯이 순항할 것처럼 보였다. 그때 마침 국제사회의 흐름도 오랜 냉전에서 이른바 ‘데탕트’시대로 접어들고 있어서 이제는 남북한 사이에 뭔가 이뤄질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설레기까지 했다.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 오가며 남북조절위원회도 몇 차례나 열렸다. 이대로만 나간다면 통일에 관한 논의도 크게 진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다. 남북한을 오가면서 서로의 달라진 모습도 직접 보고, 남북이 분단된 지 4반세기 만에 극히 제한된 일부지만 양쪽이 서로 만나 이야기도 나누면서 조금씩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듯 했다. 하지만 단꿈은 여기까지였다.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온 지 1년 하고도 한 달 남짓인 1973년 8월 28일 북한 측의 일방적인 회담거부로 남북조절위원회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남북에서 동시에 발표한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부푼 꿈은 이 시점에서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었다. 과연 북한과의 합의라는 것이 언제, 어디까지 실천이 가능하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로 인해 역시 북한하고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 하는 절망적인 인식이 새삼스럽게 뿌리내렸다. 아무리 공들여 만든 합의라도 어느 한쪽이, 특히 북쪽이 트집을 잡아 파기해 버리면 모두가 일장춘몽이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이었다.
2000년 6월 15일에는 남북정상이 만나고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그 후에도 남북 간에 크고 작은 합의가 더러 나왔지만 언제든 꼬투리만 생기면 파기하는 악습으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것이 ‘7.4공동성명’ 이후 계속된 작금의 남북관계 현주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