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탑골공원은 어르신들의 모임장소로 유명하다.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소일을 하는 장소로 일반에게 많이 알려져 있고, 매스컴에서도 노인들의 의견을 들어볼 때면 으레 탑골공원을 찾는다. 최근에 노인들의 집합장소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이 탑골공원은 실은 유구한 역사를 품은 장소이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에 까지 이른다.
탑골공원이 있던 자리는 흥복사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고찰이 있었는데, 조선 태조 때 조계종의 본사가 되었다가 후에 폐지되었다. 1464년 세조가 이를 중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이때 대종(大鐘)도 함께 만들었다. 원각사는 왕실이 주관하는 사찰이었던 만큼 도성 내 3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 이르러 폐사되고, 중종 때에는 사림들이 대거 관직으로 진출하면서 숭유억불이 강화되어 무너진 원각사의 남은 재목을 공용건물 짓는데 사용함으로써 사찰 건물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대종은 남대문으로 옮겨졌다가 임진왜란 후 보신각으로 옮겨져 보신각종이 되었다. 이 보신각종은 1985년까지도 새해를 맞이하여 타종하는 '제야의 종'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파손 위험이 있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원각사가 있던 자리에는 원각사지 10층탑과 원각사비만 남게 되어 이때부터 이 지역을 탑이 있다 하여 ‘탑골’로 부르게 되었다.
이 지역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19세기말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저술한 『경성부사』 제1권에는 1897년 총세무사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1897년이면 브라운은 이미 해고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 그의 건의로 개설되었다면, 그 해는 1895년이나 1896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원 이름이 파고다가 된 것은 원각사 탑이 있었기 때문에 탑의 영어단어 ‘pagoda’를 따서 그대로 파고다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 공원이 조성될 당시에는 공터에 나무를 심고 벤치를 둔 정도였다. 1902년경에는 공원 서쪽 부지 일부에 군악대 건물이 세워졌다. 대한제국은 1900년 독일인 음악가 에케르트를 초빙하여 군악대를 만들었는데, 이때 군악대의 전용 건물을 파고다공원 일각에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1907년 통감부의 명령으로 군악대가 해산되자 방치되었다가 1919년부터는 경성도서관으로 이용되었고 광복 후에는 종로도서관으로 이용되었다. 1910년 파고다공원의 관리권은 총독부로 넘어갔고 총독부는 이곳에 정자·의자·화단·연못·회유도로·전등·수도·온실 등의 시설을 하였으며, 벚나무와 상록수를 심었다.
탑골공원이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 곳이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처음 외친 3.1운동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듣고 3.1운동에 나섰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파고다 공원은 나라잃은 설움을 달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해방후 미군정기였던 1946년에는 원각사 10층 석탑의 맨 위층 3개 층이 미군들에 의해 제자리를 찾아갔다. 우리나라에 진주하여 있던 미 24사단 소속의 공병대에 의하여 기중기로 상층에 올려져 원상태로 복원된 것이다. 이 공사 때에는 공원이 장안의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파고다공원 재정비는 1967년에 이루어졌다. 이때 종로도서관이 사직공원 옆으로 이전하면서 기존의 건물을 허물었고, 공원 서편에 파고다 아케이드라는 상가를 만들어 그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이 파고다 아케이드는 지어진지 16년 후인 1983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투시형 담장을 설치하고, 서문과 북문 등 사주문을 복원하였으며, 공원 부지도 확장·정비하였다.
1991년에는 공원의 이름도 원래의 지명인 ‘탑골’을 따서 ‘탑골공원’으로 바꾸고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으로 면모를 일신시켰다.
1998년을 기준으로 공원의 면적은 19,599㎡였으며, 경내에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가 옛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이 밖에 3.1운동의 대표자 손병희의 동상과 1966년 5월에 제막한 높이 10m의 3·1운동을 묘사한 부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