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이후 매년 5월 1일 근로자의 날에는 정부 주최로 기념식이 열리고 이 자리에서 노사화합과 경제 발전에 기여한 모범근로자들에게 표창을 수여한다. 또한 각 기업 및 노동조합별로 근로자의 사기를 높이고 근로조건 개선과 노사화합을 다지는 기념식 및 집회 등이 열린다. ‘근로자의 날 기념 노래 자랑’ 등 근로자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각종 기념행사도 진행된다. 전 세계 근로자들이 단결된 힘으로 하나 되는 날, 근로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날, 근로조건과 환경 개선을 위해 근로자들의 의지를 표명하는 날, 노동운동에 헌신한 근로자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날. 이 날이 바로 법정기념일로 정해진 근로자들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근로자의 날’이다.
「근로기준법」 제2조 제1항 제1호에는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한다’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는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급료·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를 말한다’로 되어 있다. ‘근로자의 날’에는 이러한 근로자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기념행사를 한다.
‘근로자의 날’의 근간은 메이데이(May day)에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던 1800년대 중반,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에서 18시간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저임금에 시달렸다. 열악한 근로환경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은 전혀 인간답지 못했다. 반면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더 많은 부를 얻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8시간 노동제를 반대했다. 국제적 사회주의 조직이었던 제1인터내셔널은 노동시간 단축을 의미하는 ‘8시간 노동제’를 법률로 정할 것을 요구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방직노동자들은 1884년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면서 노동쟁의를 시작하였고 미국의 노동조합연맹도 이에 가담하여 8시간 근로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886년 5월 1일, 시카고의 노동조합연합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단행되었는데, 이들의 요구도 1일 8시간 노동제였다. 시위 첫 날 25만 명의 노동자가 이미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있는 공장에서 만든 일명 ‘8시간 노동구두’를 신고 거리로 나와 노동자의 권익회복을 외치는 평화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틀 후에 열린 2차 시위에서 노동자와 경찰이 충돌하는 바람에 어린 소녀를 포함하여 파업 농성 중인 노동자 6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5월 4일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30만 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의 탄압을 규탄하는 항의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180여명의 무장경찰이 시위행렬을 해산시키는 도중, 느닷없이 사제폭탄을 터져 경찰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를 하였고 200여명의 노동자가 부상을 당하고 수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현장에서 왜 폭탄이 터졌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지만, 당시 경찰은 근로자들이 경찰을 살해했다면서 노동운동가 8명을 폭동죄로 체포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3년 뒤 1889년 세계 20개국의 사회주의운동가와 노동운동지도자들이 세계 노동운동의 연대 조직 결성을 위해 프랑스 파리에 모여 제2인터내셔널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1886년 5월 8시간 노동시간 쟁취를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념하고 그때의 희생자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5월 1일을 메이데이(May day)로 정하였다. 국제노동자협회는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함께 1일 8시간 노동의 확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시위를 조직한다’는 실천 결의 사항을 밝히며 1890년 5월 1일 첫 메이데이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메이데이는 전 세계 여러 나라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력을 보여주는 날로 정해졌다. 메이데이의 시작을 열었던 미국은 노동절마다 벌어지는 근로자들의 파업과 시위 때문에 원래 메이데이였던 5월 1일을 '법의 날'로 정하고 대신 9월 첫째 월요일에 메이데이를 기념하고 있다.
1923년 5월 1일, 사회주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연맹회’ 주최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메이데이(May Day)행사를 준비하였다. 세계노동운동과 뜻을 함께 하려 했던 이 행사에는 서울의 각 노동단체와 공장노동자들이 당일 동맹파업을 결의하고 장충단에 모여 ‘노동시간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는 시위행진을 열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총독부는 장충단으로 모여드는 노동자들을 잡아들여 행사는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대신 약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서울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기념 강연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나라의 메이데이행사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해방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1946년 5월 1일, 해방 후 처음으로 좌익 노동단체인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전평)’에서 주관하는 노동절 기념행사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개최되었다. 이곳에 모인 노동자들은 약 20만 여명이었다. 이날의 행사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열렸으며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즉시 실천하라. 생활이 보장되는 최저 임금제를 실시하라. 실업자에게 직업을 달라. 공장 폐쇄 및 해고 절대 반대’와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정부와 미군정은 좌익 단체의 노동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전평)’에서 주최하던 메이데이 행사는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말았다.
1957년 5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5월 1일은 공산도당들이 세계 적화를 위해 선전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날이니 이날과 구별하여 반공하는 우리 대한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되도록 하라‘는 지시로 노동절에 대한 시정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은 1958년 11차 전국 대의원 대회에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결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바꾸었다. 1963년 4월 17일에는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의 개정과 함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도 공포되었는데, 이때 ‘노동절’의 명칭이 ‘근로자의 날’로 바뀌게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하였으나 3월 10일 ‘근로자의 날’에 대해 많은 노동단체들은 불만이 있었고, 1987년 7~9월의 노동자 대투쟁 당시 여러 노동단체들의 연대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에서는 3월 10일을 더 이상 근로자의 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선언을 하였다. 세계 노동절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던 1989년에는 전국에서 동맹파업 및 거리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정부는 노동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1994년 3월 9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근로자의 날’을 5월 1일로 변경하였다.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법률 중에 가장 짧은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이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률은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하고, 이 날을 「근로기준법」에 따른 유급휴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근로자라면 ‘근로자의 날’에는 휴무가 원칙이고 근로자가 일을 하지 않아도 임금을 지급해야 하며 사정상 근무를 하는 경우 통상임금의 50%를 가산 받게 된다. 다만 공무원은 근로기준법에 적용받는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근무가 원칙이다. 또한 ‘근로자의 날’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나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서 정한 법정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공무원과 학교, 종합병원, 주민센터, 시군구청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