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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3종세트 애국가, 대한뉴스, 문화영화 문화영화

1960년대부터 불과 20여년 전인 1995년까지 영화관에 가면, 보고자 하는 영화와 함께 국가에서 국민 계몽이나 교육, 혹은 정책 선전을 위해 만든 계몽영화를 보아야 했다. 이를 통상적으로 ‘문화영화’라고 불렀다. ‘애국가’, ‘대한뉴스’와 함께 영화관의 필수 3종 세트처럼 상영되던 문화영화는 1962년 「영화법」이 만들어지면서 개봉영화와 극장 동시상영이 강제화 되었다. 원래는 기록영화나 실사영화라는 의미의 단어였던 ‘문화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국책홍보와 국민계몽 목적의 단편영화를 의미했다.

뉴스영화 상영에 관한 건 참고 이미지
뉴스영화 상영에 관한 건(1951)
뉴스 영화의 날 참고 이미지
뉴스 영화의 날(1953)

문화영화란

문화영화란 독일어 “쿨투어 필름(kultur film)”을 일본에서 직역한 것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기록영화나 실사영화와 동일한 개념이었으나, 기록영화가 세분화 되면서 계몽이나 교육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일컬어 ‘문화영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문화영화는 교육영화, 계몽영화, 뉴스영화, 홍보영화 등 주로 실용적 목적을 가진 영화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개봉 영화 상영 전에 상영했던 단편 계몽영화를 지칭하여 문화영화라고 불렀다.문화영화의 동시상영이 강제된 1962년「영화법」에는 문화영화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문화영화는 일반 기록영화와는 대조되는 목적의식이 있었던 바, 국가가 중심이 되어 제작·배포되었다. 1950년대에는 영화관 등의 시설이 미비하여 부정기적으로 상영되다가 「영화법」이 만들어지면서 극장에서 강제적으로 상영되었고, ‘애국가’와 ‘대한뉴스’의 상영이 중단되고 난 이후에도 문화영화는 1995년까지 계속 상영되었다.

영화법 참고 이미지
영화법(1961)

문화영화의 이모저모

우리나라의 문화영화 상영은 광복 직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는 기록영화와 문화영화의 개념이 혼용되어 있는 상태였다. 특히 6.25전쟁 중에는 전쟁 상황을 기록하여 일반에 공개 하면서 ‘반공사상과 애국심 고취’를 목적으로 하였는데 이는 기록영화이자 문화영화의 성격이 강했다.
6.25전쟁 시기 만들어진 기록영화 「싸우는 대한민국」은 광복부터 1951년까지 6년간의 기록을 편집하여 만들었는데, 주로 광복 후 정치·사회적 변화와 6.25전쟁 상황을 반공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유엔군, 특히 미군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새로운 희망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이었다. 이 영화는 전쟁 중이던 1951년 정부에서 제작비 1억환 전액을 내서 만들었다.

싸우는 대한민국(가제) 제작계획서 참고 이미지
「싸우는 대한민국(가제)」 제작계획서(1951)

이후 1950년대 문화영화는 대통령선거 전 이승만대통령을 추앙하는 내용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1953년 정전 직후 여군의 생활상을 보여주면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이 문화영화 <여군>은 나애심 등 당대 유명한 여가수가 출연하고, 「자유부인」으로 1950년대 말 센세이션을 일으킨 한형모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
한편, 문화영화는 외국에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이나 생활상을 기록, 한국어와 영어로 더빙하여 해외에 배포하기도 한 것이다. 이 시기 문화영화는 주로 지방을 순회하며 계몽과 교육의 이름으로 정책을 홍보하고 전파하기 위해 대중을 동원하는 형태로 상영되었다.
1961년 ‘문화영화제작자문위원회’가 공보부 산하에 만들어지고 196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극장에서 문화영화가 강제 상영되었다. 1960년대 문화영화의 성격은 경제개발과 산업화, 방공이 주요한 내용으로, 이전보다 더 많이 국가 시책을 국민에게 선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재건과 산업화를 통한 경제개발은 이 시기 정치·경제의 화두였다.

문화영화 「여군」 제작에 관한 건 참고 이미지
문화영화 「여군」제작에 관한 건(1953)
노부부의 팔도유람결심 및 청주도착 참고 이미지
노부부의 팔도유람결심 및 청주도착
(1967)

한편, 기록 실사 영화는 아니지만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픽션으로 제작한 <팔도강산>은 산업화를 통한 경제개발이라는 국가정책을 홍보하는 문화영화의 성격을 띠면서도 3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인기를 얻었다. 1967년 2월 지금은 사라진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팔도강산」은 1남 6녀를 둔 협동한약방의 김희갑, 황정순 부부가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일주를 하는 내용으로, 각 지역의 명승지와 함께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전국의 산업현장을 소개하였다. <팔도강산>은 1편의 인기에 힘입어 팔도강산 해외편에 해당하는 <팔도강산 2>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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