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의 희생양으로 뒤주 속에 갇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열한 살 이산(훗날 정조)은 14년 뒤 장성한 청년이 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하고 존호도 사도에서 장헌으로 개칭하였다. 정조가 죄인 신분으로 죽은 아버지의 위상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세울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가 왕으로서 이루고자 했던 많은 일 중심에는 늘 아버지에 대한 그의 강한 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반대했던 노론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정조는 양주 땅에 묻혀 있던 아버지의 유해를 수원 ‘현륭원’으로 천봉하였고, 그로부터 5년 뒤 성곽을 축성해 1796년에 완공했다. ‘화성’이란 이름 역시 아버지가 잠들어있는 현륭원이 있는 산, 화산(花山)을 품고 있다는 의미로 빛날 화를 써서 화성(華城)이라 지었다.
정약용이 설계하고 벽돌과 거중기를 이용해 축성한 수원화성은 오늘날 과학과 건축, 예술을 통틀어 우리나라 성곽 건축 사상 독보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의 장점만 살려 축성됐으며 한국 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축성술을 본뜨기도 했다. 이 성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화성성역의궤』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사보고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록은 훗날 수원 화성을 복원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수원 화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 한국 토지공사는 우리나라 땅에 얽힌 이야기를 모은 책 『땅 이야기』를 펴내며 ‘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도시 대부분이 과거 자연 마을에서 관가나 병영의 설치에 따라 확대된 무계획적 도시였던데 반해 화성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였다. 화성을 최초의 신도시라고 하는 주된 이유는 정조가 현대의 신도시와 마찬가지로 개발이 뒤떨어져 고작 5~6가구만 사는 너른 들판을 87만 3천 5백 17량 7전 9푼의 사업비를 들여 근대식으로 성을 쌓고 택지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신도시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한성과 평양 등의 부호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유도한 뒤 주민들이 계를 짜게 하고 이 계원들에게 중국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줘 결국 화성 땅에 2백여 가구가 모여 사는 당대 최대의 도시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었던 화성 역시 역사의 아픈 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1923년 조선총독부는 화성 행궁(行宮 : 왕의 임시처소)을 허물고 화성행궁내 봉수당에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구 도립병원)을 설립하고 북군영 자리에 경찰서, 토목관구를 설치하였다. 또한, 6.25전쟁의 포화는 성벽과 문루를 허물었다.
1979년 화성의 첫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화성행궁은 복원 대상에서 빠졌다. 장안문은 복구되었지만 도시의 중심 도로 속에 갇혀버렸고 팔달문은 복원하지 못했다. 정부는 1996년, 70년 만에 수원 성내 화성행궁의 복원작업을 착수했다. 44채 577칸의 행궁을 복원하기 위해 879억 원의 사업비가 들어갔다. 당시 수원화성은 수원성곽으로 불렸는데 정부는 1996년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의 이름과 등급을 본래 이름으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때 수원 화성으로 본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수원 화성은 1997년에 UNESCO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4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평가단이 현지 평가를 하면서 ‘역사는 불과 200년 밖에 안 됐지만 성곽의 건축물들이 동일한 것 없이 제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하였다.
1997년 12월 수원 화성은 창덕궁과 함께 세계유산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이 두 문화재의 공동등재는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1795년 윤 2월 9일 아침, 정조가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까지 약 40km(당시 기준)의 행차를 떠났기 때문이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목적으로 정조는 수원 화성으로 떠났고, 행렬이 화성에 도착한 다음 날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을 찾았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행차를 김홍도 등에게 명을 내려 『화성원행의궤도』를 만들었고 행차의 전 과정을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자세히 기록했다. 이 기록 덕에 2017년, 정조대왕능행차가 전 구간에 걸쳐 완벽 재현됐다. 222년이란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놀라운 역사적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화성의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 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화성행궁과 내포사가 복원되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대문과 각종 방어시설이 화성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팔달문은 수원 화성의 남문으로 현재는 이어지던 성벽이 끊긴 채 서 있는데 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복원이 쉽지 않다. 화서문은 수원화성의 서문으로 보물 제403호이다. 화서문의 모든 시설과 규모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와 형식이다.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한다. 팔달문과 함께 수원화성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힌다. 수원화성의 동쪽에 위치한 창룡문은 6.25전쟁 때 크게 파괴됐지만 1975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원거리 초소인 공심돈이다. 성벽보다 높은 2층으로 된 망루로 둥그스름한 원통형에 촘촘히 벽돌로 쌓고 누각을 세웠다. 내부는 3층 구조인데 층마다 총안과 포혈이 바깥을 향해 뚫려 있다. 먼 거리에서부터 가까운 거리까지 한꺼번에 적을 감시하고 방어할 수 있다.
정조가 그린 꿈의 도시, 화성. 200년이 지난 지금도 정조의 원대한 꿈과 애민정신, 그리고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자부심이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