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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전쟁, 우리 집 갖기 주택건설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한 신문사에서 실시한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에 64.6%의 응답자가 ‘집을 사겠다.’고 답했다. 많은 사람은 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저축만으로 수도권의 집을 사기 위해서는 30년 동안 월급을 모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집은 ‘사는 곳’이란 본래 가치를 넘어 이상이자 꿈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반세기 전 서울이 가진 문제점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울에는 전쟁 이후 월남한 사람들과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로 넘쳐났다. 전쟁의 폐허로 살만한 주거공간이 없었기에 집을 제공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이어졌다. 정부는 1954년 4월 1일 산업은행을 발족하고 대한주택영단과 지방자치단체에 주택건설자금을 융자하여, 1956년까지 6,230호에 달하는 이른바 재건주택·복구주택·외인주택 등을 건설했다. 그리고 1958년 1월 미국과 우리가 공동으로 주관한 제1회 전국주택설계 현상공모를 통해 주택의 대량 생산을 위해 접근을 시작해나간다. 공모전의 설계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즉, 도시주택의 경우 가족 5인, 대지 크기 40평, 건평 9평(화장실은 건물 안에 설치, 부속건물은 건평에 포함하지 않음) 등을 제시했다. 이는 대가족제도에서 부부중심의 핵가족제도를 지향하는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와 함께 농촌주택설계(농촌형 자조주택)의 조건으로는 가족 6인, 대지 100평, 건평 9평, 영농상대 논 1,000평, 밭 600평, 소 1두, 돼지 2마리, 닭 10마리로, 변소는 옥외에 설치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주택 참고 이미지
주택(1959)

이후, 도시 미관과 전후 복구를 위해 상가주택이 종로와 을지로 등 중심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1,2층은 상가와 사무실용으로, 3,4층은 주택으로 건축되었는데, 1970년대 후반 점차 사무실로 바뀌게 되었다.

국가기관과 공공단체가 건설한 국민주택 외에 단독주택들이 1960년대 이후 다량 건축됐다. 이후 2호 이상의 세대가 모여 살며, 공사비를 절감하고 단독주택의 혜택을 누리는 연립주택 건설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1963년 주택공사가 수유동에 16평형 연립주택 26호를 건설했는데, 이후 영세민을 위한 연립주택에서 호화판 연립주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건설되었다.

대한주택공사에서 주택난 해소를 위한 주택건설 참고 이미지
대한주택공사에서 주택난 해소를 위한 주택건설(1963)
정부 주택건설 실적 참고 이미지
정부 주택건설 실적(1967)

별빛이 흐르는 너와 나의 아파트, 화려한 아파트 시대의 서막

“혁명 한국의 상징이 되길 바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 대한주택공사의 마포아파트 준공식에서 한 말이다.

우리나라 아파트의 역사는 1930년 일제 강점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957년에 종암아파트가 지어졌는데, 이는 우리나라 기술로 처음 시공한 아파트이자 최초로 수세식 변기를 설치한 아파트였다.

그리고 지금의 ‘단지’ 규모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가 바로 ‘마포아파트’이다. 그러나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문화가 환영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포아파트는 고층 주택에 대한 두려움과 연탄가스 위험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초기 입주율이 10% 미만이었다. 이에 현장소장이 직접 연탄가스가 샌다고 알려진 방에서 잠을 자는 ‘인간 생체실험’까지 벌이며 아파트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려 노력했다. 1966년부터 한강 아파트단지 84,716평이 조성됐고, 1972년부터 1976년까지의 제3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에는 한강 이남인 반포동 일대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다. 반포 단지엔 22평형부터 64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형이 선보였다. 1974년 서울시는 계획인구 10만 명의 잠실아파트단지 건설계획을 발표하였다.

‘一’자형에서 ‘口’자형으로, 도심에서 주변 지역으로, 아파트의 진화

아파트 단지의 구성도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파트 입주자들이 남향을 선호하다 보니 아파트의 각 동이 ‘一’자형 배치가 주를 이뤘는데, 잠실 아파트를 건설하면서 아파트의 각 동을 口자형으로 배치하고, 녹지공간과 생활시설 등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제2정부청사의 건설에 맞춰 1979년 과천 신도시가 개발되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기간인 1982년부터 1986년에는 서울 강서구(현재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가 건립되었다. 1983년에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맞춰 올림픽 선수촌이 건설되고, 1985년에는 상계 신시가지가 개발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맞이한 경제호황은 1988년 말에 절정에 달했고 땅값과 주택가격이 급등하게 되는데, 폭등하는 집값에 전문 투기세력인 ‘복부인’까지 가세하자 정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해 국민주택 200만 호 건설대책을 내놓으며 폭등한 아파트 가격을 잡을 목적으로 1기 신도시 건설을 시작했다. 평촌, 중동, 산본 등 신도시계획이 발표되었고, 이듬해인 1989년 4월 27일 2차로 분당, 일산에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추가로 발표했다. 공급을 늘려 부동산 시장의 가격을 안정시키겠다는 정책이었다.

서민주택 200만호 구성 참고 이미지
서민주택 200만호 구성(1992)

삶은 계속된다.

얼마 전 일명 ‘땅콩집’, 두 집이 한 땅을 공유하며 분리된 생활공간을 갖는 ‘듀플렉스’ 형태의 주거공간이 등장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파트 한 채 가격보다 저렴한 돈으로 자신만의 마당이 딸린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에 사람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 건축가가 ‘집’이란 삶을 담는 그릇이라 했지만, 우리에게도 ‘집’이란 과연 그런 모습이었을까. 앞으로의 ‘집’은 사는(live) 것 뿐만 아니라, 집을 사는(buy) 사람까지도 행복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하길 기대해본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데이터뉴스,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 2014.6.2.
  • 동아일보, 「국민주택설계 등 당선자 66명 시상」, 1958.4.30.
  • 동아일보, 「제1회 전국주택설계 현상모집 공고」, 1958.1.11.
  • 서울시정개발연구원,『서울 20세기 생활문화 변천사』,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2.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레디앙, 201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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