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團成社)는 1907년 6월, 종로 3가에 목조 2층 건물의 ‘연예단성사’로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영화관이 아닌 일반 극장이었다. 창이나 무용 등으로 자선공연을 하고 그 수익금을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들어선 야학·고아원·조산원 양성소 등에 기탁하였고 폭풍우 피해 서민들을 위한 모금도 했다. 당시 연예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연장으로는 단성사 외에 광무대, 장안사, 연흥사, 경성좌 등 몇몇 극장이 있었다.
단성사는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건립 당시는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이 합자했고, 이후 사장이 이익우에서 한흥석으로 바뀌었으며, 1910년에는 일본인 후지하라에게 넘어갔다. 1911년 최우석·장기형·박기영 등 3인 공동경영으로 전환되었다가, 1918년 판소리와 창극을 주로 공연한 ‘광무대’의 운영자이자 한국영화계의 개척자 박승필(1875~1932)이 단성사를 인수, 이때부터 최초의 상설영화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단성사는 극장 최초로 일류 변사 여섯 명을 고용했고 극장 전속 관현악단을 기용하기도 했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는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국내 자본으로 만들어진 '의리적 구토'를 상영했다. 김도산 극본·연출의 이 영화는 연극에 영화 장면을 삽입한 ‘연쇄극’ 형태인데, 이를 ‘키노 드라마(Kino Drama)’라고도 부른다. 영화와 연극이 서로 바뀔 때는 호루라기 신호로 나뉘는 단점도 있었지만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남대문정거장, 노량진 등 사람들에게 익숙한 공간의 야외 장면들이 삽입되는 연출이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내용은 남자주인공 마쓰야마가 간악한 계모 밑에서 가문의 체통을 위하여 갖은 수모를 참아오다가 계모 일파의 흉계가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고 가문을 더럽힐 지경에 이르자 응보의 칼을 뽑는다는 권선징악의 줄거리이다. 제목의 ‘구토(仇討)’는 일본식 표현으로 '원수를 친다', 또는 '복수'와 통하는 의미로 보면 된다. 입장료는 특등석 1원 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 3등석 40전으로 연극 관람료가 40전 하던 것에 비하면 비싼 가격이었음에도 10만 관객이 들 정도로 흥행에 성공하였다.
한편,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처음 개봉된 1919년 10월 27일을 기념하여 이후 매년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제정하였다.
단성사는 무성영화 시절의 주옥같은 작품,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나, ‘카추샤’, ‘몬테크리스토 백작’, ‘파우스트’ 등을 상영했다. 또한 다른 극장과 달리 상영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체 제작·상영·배급을 했던 극장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923년 영화 제작부를 만들어 서너 편의 무성영화 제작을 했고, 1924년에는 순전히 조선인들의 힘으로 최초의 영화인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다.
1926년 10월 1일, 민족의 울분을 분출시켰던 나운규의 ‘아리랑’을 개봉한 것도 단성사다. 나운규 감독·출연의 ‘아리랑’은 일제하에서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담은 작품이었다. 개봉 첫날부터 유례없는 인기를 끌었고, 종로의 YMCA 건물까지 줄을 서기 일쑤였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후에 “목 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고 회고했다. 변사의 임기응변에 반일 표현이 섞이기도 해 조선총독부에서 감시했다고 한다. ‘아리랑’은 2년 연속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웠으며, 감독이며 변사인 김영환이 ‘아리랑’ 주제가를 편곡해 ‘민족의 노래 아리랑’으로 확산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단성사는 명실상부 최고의 상설 영화관으로 자리잡았다.
단성사는 1927년 전문 영화음악 연주단 ‘단성관현악단’을 조직하고, 1931년 6월 영화 전문잡지 『영화가』를 발간했으며, 1937년 8월 11일 영화감독 나운규의 영결식을 거행하는 등 한국 영화사에 큰 기여를 했으나, 1932년 박승필 사장이 사망한 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9년 6월, 일본인 이시바시 료스케가 인수해 ‘대륙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광복 후 1946년 1월에 단성사라는 이름을 다시 찾았다.
이후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단성사는 제2의 전성기를 되찾았다. 단성사 상영은 흥행의 보증수표로 인식되었는데, ‘역도산’(1965), ‘겨울여자’(1977),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등 히트작들이 잇달아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1993년 4월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194일이라는 개봉관 최장 상영에 관객 113만 명 이상을 기록하면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도 받고 있다.
복합영화관 시대로 바뀌면서 2001년 9월 단성사 건물 철거 후 2005년 총 10개관으로 재건축했으나 경영난으로 2008년 부도 처리되었고, 같은 해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하였다. 2012년 법원의 경매 개시 결정이 된 이후 2015년 7월 세 번의 유찰 끝에 영안모자 계열법인인 ‘자일오토마트’가 575억 원에 인수하였다. 2016년 9월 1일 ‘단성골드빌딩’으로 명칭을 바꾸고 1층에 ‘단성골드주얼리센터’를 오픈했는데, 단성사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단성사 터 역사 전시장'도 마련하고 정원에는 단성사의 표지석도 전시하였다. 지하에 단성사 영화관 복원, 한국영화 100년 역사관 개관 등의 계획이 발표되었으나 2017년 현재까지 완공이 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