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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기계화 : 낫과 호미에서 트랙터와 콤바인으로

경운기 이장의 탄생

1970년대 초 농촌에는 ‘경운기 이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농기구로 3일 동안 할 일을 경운기로는 하루면 다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품삯을 주고라도 경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삯갈이를 시켰다. 그래서 당시로는 고가에 해당하는 40만 원이나 하는 경운기를 빚을 내서 마련하고 이 삯갈이를 통해 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다. 경운기를 구입한 농가에서는 가까운 이웃을 불러 고사를 지낸 후 떡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잔치를 했을 정도였으며 경운기가 있는 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재산 목록 1호는 소 대신 경운기가 차지했고 비가 오면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서 경운기를 덮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경운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논을 갈고 나면 싼값으로 이웃의 논도 갈아주면서 인심을 얻었다. 자연히 동네에서 발언권도 세졌으며, 마을 이장이라는 감투를 쓰면서 ‘경운기 이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경운기의 사용에서부터 트랙터, 이앙기 등의 농기계는 인간 노동력에만 의지했던 우리 농촌을 근대화시킨 주역이 되었으며, 부농의 척도는 농기계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로 가늠할 만큼 농기계와 농촌영농은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농업기계화 썸네일 이미지
농업기계화(1972)
농업의 기계화 썸네일 이미지
농업의 기계화(1973)
전국농업기계전시회장 개장식 썸네일 이미지
전국농업기계전시회장 개장식(1974)

기계소리 메아리치는 우리 농촌

우리나라에서 농기구가 현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좁은 경지에서 이동해야 하고 또 작업의 대상이 작물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농업의 기계화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시화로 인해 농업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농업의 기계화는 시급한 일이 되었다. 또한 농사는 중노동의 작업이라 작업 능률의 향상을 위해서 농업의 기계화는필수적인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농기계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정부는 정책적으로 농업기계화를 지원했다. 재해대책을 위한 양수기와 병충해 방제용 동력 분무기 등을 완제품이나 반제품으로 도입하여 농가에 공급하였다. 이 무렵 한국 농기계 생산의 상당 부분을 대동공업이라는 회사에서 담당했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농기구를 제작하던 철공소에서 출발했던 대동공업은 일본의 미쓰비시 중공업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1962년부터 동력경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쓰비시와 국산 생산 협약을 체결해 기술을 들여온 대동공업은 수년 안에 모든 부품을 국산화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기술 개발을 하였다. 경운기의 보급에는 정부의 보조, 융자 지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운기는 논밭을 갈거나 땅을 고르고 흙덩이를 부수는 일을 한다. 씨뿌리기나 운반과 같이 이동을 하면서 하는 작업과 탈곡 작업도 할 수 있다. 또 경운기에 부착된 엔진을 이용하여 양수기나 분무기로도 이용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나 화물까지도 실어 나를 수 있다. 그래서 농업 기계화에 있어 경운기는 첫 단계와 같았다. 1968년에는 디젤 경운기가 생산 보급되기도 했다.

1969년 2월 24일 농업기계화촉진 8개년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은 논갈이, 방제, 물푸기, 탈곡 등 모든 농업과 관련된 일은 전면적으로 기계화한다는 목표 아래 4백 6억 원을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부는 1972년부터 농업기계화 5개년계획을 수립해 농기계 보급에 더욱 열을 올렸다. 이는 당시 확산되고 있던 지역사회개발운동인 새마을운동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1973년 경제기획원이 제출한 농업기계화 계획에 따르면, 국민투자기금 300억 원을 기계화에 투입하고 이를 통해 1976년까지 경운기 10만 대를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농업기계화에 따른 1970년대 정부 정책의 방향은 동력경운기 중심의 기계화였다. 이러한 정부 정책에 따라 경운기의 보급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꾸준히 늘어났다. 소가 하던 갈기, 흙부수기, 땅고르기, 운반 등의 작업은 경운기로 대체되었다. 경운기는 1983년을 정점으로 감소하다가 1993년 정부의 반값 공급정책으로 인해 수요가 다시 크게 증가하였다. 경운기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농촌에 가장 널리 보급되어 농업기계화에 크게 기여한 농업동력원이다.

농업기계화 촉진법 제정
농업기계화 촉진법 제정(1978)

1970년대 이후 꾸준히 늘어나던 농기계 보급은 2000년 이후 줄고 있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강력한 보조금 정책이 끝나고 농촌인구도 급격히 감소하면서 소형 동력경운기에 대한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1978년에는 「농업기계화촉진법」도 제정되었다. 「농업기계화촉진법」은 농업기계의 개발과 보급을 촉진하고 효율적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농업생산성 향상과 경영개선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9년에는 한국농촌진흥청 산하 농업기계화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농업기계화연구소는 농업용 기계 및 시설장치 등 농업공학에 관한 시험, 연구 및 품질평가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곳에서는 경운기, 트랙터, 이앙기, 파종기, 탈곡기, 양수기 곡물건조기 등을 기계공학적인 면에서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에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농기구들이 기계화하였다. 벼를 베는 기계로 예취와 동시에 자동으로 다발로 묶어내는 작업을 하는 예취결속기(刈取結束機, binder), 농작물을 베거나 탈곡하는 일을 동시에 하는 콤바인(combine), 못자리나 육묘상자에서 자란 모를 논에 옮겨 심는 이앙기(移秧機)까지 선보여 농기구 기계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밖에 농업에 사용되는 각종 작업기를 견인하거나 또는 동력을 전달하여 작업을 수행할 목적으로 설계된 트랙터, 고성능엔진을 부착한 석유발동기, 병충해방제용 미스트기, 인력분무기와 자동탈곡기, 수확기, 건조기, 벼·보리 등 낟알의 층을 벗기는 도정기 등 많은 농기계들이 농촌의 일손을 덜어주고 있다. 최근에는 철제의 써레, 지게가 등장하였으며, 플라스틱 제품의 거름통, 오줌통까지 나와서 농기구의 수명이 늘어났다.

[대한뉴스 제1093호] 전국농업기계 종합전시
[대한뉴스 제1093호] 전국농업기계 종합전시(1976)

벼농사에 있어 1965년에는 10a당 약 141시간, 1995년에는 같은 면적당 37.4시간으로 1/4가량 노동시간이 줄었다. 농가인구가 꾸준히 감소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농업 기계화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집필자 : 황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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