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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속에서 국가의 은행이 되기까지 한국은행

"한국은행은 국가의 기관이며 국민의 기관이며 또한 은행의 은행이며 국제적 은행임을 오늘 일천 명 직원과 같이 다시 이 자리에 명심하고...”(「한국은행 발족」, 경향신문 1950년 6월 13일자 기사 중 한국은행 총재 구용서 소감)

6.25전쟁 2주 전 설립된 중앙은행

1945년 9월 7일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는 조선에서 일본 은행권의 통용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사항으로, 일본으로부터 귀국하는 동포들에 대해서만 금액에 제한 없이 일본 은행권을 조선 은행권으로 바꿔주기로 했다. 화폐 교환의 유일한 창구는 귀국 동포들이 도착하는 부산의 조선은행 부산지점. 하지만, 당시 조선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일본 은행권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일본 은행권을 조선 은행권으로 바꿔야 했다. 그때 바꾸지 못하면, 일본 은행권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조선은행 부산지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본 은행권을 조선 은행권으로 바꿔 달라는 부탁은 물론 위협과 폭력이 난무했다. 그러면서 크고 작은 부정이 발생했고, 마침내 1946년 3월 조선은행 부산지점 간부들이 1명을 제외하고 전원 경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렇게 광복 직후 일본 화폐와 조선 화폐가 공존하는 상황은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면서 강력한 권한과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필요해졌다.

마침내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설립되었다. 당시 조선은행에서 조선 사람 최초로 지점장을 역임한 구용서는 한국은행의 초대 총재 자리에 오르는데, 그는 조선은행 부산지점 사태를 수습하는 등 광복 후 혼란한 금융시장을 현명하게 잘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창립기념식에서 직원들의 선서문이 낭독되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된 영예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직원에 임명된 영광을 갖게 된 것을 충심으로 감격하는 바입니다”

한국은행법 참고 이미지
한국은행법(1950)
한국은행 창립50주년 기념주화 발행 공고 참고 이미지
한국은행 창립50주년 기념주화 발행 공고(2000)

그러나 감격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은행 설립 2주 후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국운(國運)으로 평가받았던 한국은행

중앙은행의 역할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되면서 직원들은 화폐를 수급해오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에 필요한 화폐 수급이 급선무였다. 방법을 찾던 은행원들은 한국은행 도쿄지점을 통해 ‘한국은행권’을 만들게 되었다. 우리의 첫 한국은행 화폐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 시작 2주가 넘어가던 7월 13일 새로 만든 한국 은행권이 진해로 수송되었고, 한국은행은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광복 이후 계속 사용되던 조선 은행권 화폐가 아닌 최초의 한국 은행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게 한국은행은 전쟁 시 필요한 화폐 수급은 물론, 금융기능의 유지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인플레이션을 수습해 나갔다. 그야말로 국운이었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전쟁 직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출범은 우리에겐 크나큰 행운이었다.

한국은행 재건 상황 참고 이미지
한국은행 재건 상황(1956)
한국은행 본관 준공식 참고 이미지
한국은행 본관 준공식(1958)
한국은행 본관 참고 이미지
한국은행 본관(1959)
한국은행 내부 전경 참고 이미지
한국은행 내부 전경(1962)
한국은행 별관 전경 참고 이미지
한국은행 별관 전경(1963)
한국은행 창립20주년 기념식 전경 참고 이미지
한국은행 창립20주년 기념식 전경(1970)

한국은행, 독립을 위한 끝없는 노력

1960년대 한국은행은 정부 주도의 성장 위주 경제정책을 위해 금융제도를 개발금융 지원체제로 개편했다. 그러면서 1962년「한국은행법」 개정에 따라 외환 정책이 재무부(현 기획재정부)로 넘어가고, 한국은행은 독립성을 갖지 못한 채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오명 또한 이 시기에 생겨난 것이다. 당시 한국은행의 업무 대부분이 정부의 경제성장을 금융 측면에서 지원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장을 재무부장관이 맡았다.

1988년 김건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직원들과 함께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실시했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그리고 몇 년 뒤 1996년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정부는 마침내「한국은행법」 을 개정해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장직을 재무부장관이 아닌 한국은행 총재에게 맡겼다. 기준금리 결정 등 한국은행의 책임성을 강화했다. 2003년에는 한국은행 부총재가 당연직 위원으로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고, 한국은행의 자체 예산권을 강화한 제7차「한국은행법」 개정이 이뤄졌다. 2012년에는 한국은행 총재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실시한다는 내용의「한국은행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한국은행의 위상과 독립성이 좀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는데, 그 개정안으로 2014년 3월 새 총재에 대한 첫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들어서면서도 금융 불안을 수차례 겪은 바 있는 우리나라.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공정성, 독립성을 기반으로 한 우리나라의 중앙은행, 한국은행의 역할과 기능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집필자 : 최유진)

참고자료

  • 경향신문, 「한국은행 발족!」, 1950.6.13.
  •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 매일경제, 「韓銀(한은), 중립·독립 보장을!」, 1987.9.24.
  • 조선일보,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한국은행 산 증인’ 문상철 씨」, 200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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