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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1,400년간의 잠에서 깨어나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던 당시로 시계를 되돌려보자. 그해 7월 전국은 긴 장마로 신음하고 있었다. 백제 고분군이 밀집해 있던 충남 공주시 서북쪽 송산리(오늘날 금성동) 언덕에서는 문화재 발굴단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죄다 도굴해버린 6호분은 벽면 사방에 사신도만 남고 도굴 과정에서 천장이 훼손돼 물이 스며들었다. 또 여름만 되면 무덤 안과 밖의 기온 차이로 이슬이 생겨 벽화가 훼손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여름부터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뒤쪽 언덕을 파내려가게 되었다. 7월 5일 6호분의 뒷산, 배수로를 파던 인부의 삽에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파내려가 보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이 구조물은 6호분이 아닌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백제무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공사는 중단되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발굴단이 파견됐다. 현장에 도착한 발굴단원들은 벽돌로 쌓은 구조물이 또 다른 전실묘의 입구란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날 밤 큰 비가 내려 이튿날 아침에 무덤의 문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이때만 해도 발굴단은 이 무덤이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 '무령왕릉'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 3시쯤 무덤 입구가 나타났다. 일단 막걸리와 수박·북어를 올려놓고 위령제를 지냈고 막아놓은 부분의 맨 위 벽돌 2개를 들어내자 무덤에서 하얀 수증기가 새어나왔다. 1,400년 이상 밀폐 상태로 갇혀 있던 무덤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를 만나 흰 수증기로 변한 것이다.

[대한뉴스 제 836호] 백제의 신비(무령왕릉 발굴)
[대한뉴스 제 836호] 백제의 신비(무령왕릉 발굴)(1971)

지석으로 무덤의 주인이 밝혀져

무령왕릉의 무덤에는 두 개의 지석(誌石, 묘지석(墓誌石)이라고도 함.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업적, 자손 등을 기록한 판석이나 도판을 말한다. 무덤의 내역을 밝힐 수 있어 고분 발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이 있었다. 수많은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되었지만, 어느 왕의 무덤인지를 확실한 기록과 유물로 알려준 것은 무령왕릉이 처음이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라고 새긴 지석은 무덤의 주인이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었다. ‘사마’는 백제 25대 무령왕의 본명이고,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521년 중국 양나라의 임금 무제로부터 받은 직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령왕은 523년 5월 사망하여 525년 8월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 사망하여 529년 2월 안치되었음’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무령왕릉 및 공주박물 유물 썸네일 이미지
무령왕릉 및 공주박물 유물(1971)
무령왕릉 출토 금제관식(귀걸이) 썸네일 이미지
무령왕릉 출토 금제관식(귀걸이)(1971)
무령왕릉 내부 썸네일 이미지
무령왕릉 내부(1973)

무령왕릉(武寧王陵)의 발견은 신라,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백제문화의 위상을 드높이는 결정적 전기가 됐다. 출토된 유물은 지석(국보 163호) 외에 각종 금은 장신구와 청동제품, 이기류(利器類), 도자기, 목제품 등으로 수수하면서도 기품 있는 백제 공예의 면모를 뚜렷이 보여준다. 중요 장신구로는 왕이 소지한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金製冠飾) 1쌍(국보 154호), 금귀고리 1쌍(국보 156호), 금제 뒤꽂이 1점(국보 159호), 은제과대 외 요패 1벌, 금동식리 1쌍, 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環頭大刀)와 금은제도자(金銀製刀子) 각 1점, 발받침 1점(국보 165호) 외에도 청동제품으로 신수문경(神獸文鏡), 의자손명수대문경(宜子孫銘 獸帶文鏡), 수대문경(獸帶文鏡, 이상 국보 161호) 등 각종 거울과 청동 접시형 용기, 청동완, 청동개, 수저, 젓가락, 다리미 등이 나왔고, 기타 도자 제품으로서 등잔 등 모두 4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1974년 7월 9일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 17건에 이른다.

무령왕릉 종합정밀조사 결과 및 향후대책(1994)
무령왕릉 종합정밀조사 결과 및 향후대책(1994)

성급함이 망친 발굴…후회스럽다” 두고두고 논란이 돼온 발굴과정

무령왕릉 발굴은 20세기 한국 최대의 발굴이었지만 발굴 작업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면 경찰의 협조를 받아 철조망을 둘러쳐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충분한 장비를 갖춘 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연구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경험 부족과 통제 범위를 벗어난 상황에 이끌려 체계적인 발굴 없이 하룻밤 만에 이루어졌다. 복잡한 현장에서 발굴단은 긴급회의 끝에 사고 방지를 위해 신속하게 발굴을 끝내기로 했다. 유물이 훼손, 손실될 수 있다는 압박감 탓에 짧은 시간 안에 마무리했다.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유물들이 하나씩 옮겨진 후, 남아있는 잔존물들은 삽으로 떠서 포대자루 안에 담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비록 유물은 챙겼지만, 유물만큼이나 중요한 유물의 배치 현장에 대한 기록이 부실했다. 남아있는 자료는 무덤의 실측 자료와 몇 장의 사진뿐이었다. 중요한 유적을 우리 손으로 발굴 조사한 경험도 없을뿐더러 발굴 조사와 관련된 행정 조치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던 때였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7번째로 발견된 고분인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13호)은 2015년 7월 8일 독일 본(Bonn)에서 개최된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http://terms.naver.com)
  • 『백제무령왕릉』, 충청남도·공주대학교박물관, 1991.
  • 『무령왕릉발굴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73.
  •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빛 무령왕릉』, 돌베개, 2005.6.24.
  • 『백제고분 발굴이야기』, 주류성 펴냄, 2005.11.24.
  • 『고고학과 박물관 그리고 나 』, 학연문화사, 2011.2.25.
  • 『20세기 이야기 - 1970년대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답다, 2012.12.10.
  • 「무령왕릉 및 송산리 6호분의 전축구조에 대한 고찰」 백제연구 5, 1974.
  • 「중국묘제가 무령왕릉에 미친 영향」 백제연구 11, 1979.
  • 「무령왕릉의 장법과 묘제」, 충청남도·공주대학교, 1991.
  • 대전일보, 「무령왕릉」, 2015.7.9.
  • 한국일보, 「세계문화유산 무령왕릉」, 2015.7.5.
  • 금강일보, 「무령왕릉과 공산성」, 2015.9.30.
  • 새전북신문, 「백제유적 세계유산 등재에도 관리 '제자리'」, 201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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