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서울의 봄은 이 땅에 민주화라는 희망을 가지고 따뜻하게 시작되었지만, 전국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로 들끓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각지에 계엄군을 주둔시켜 시위를 봉쇄하고자 했고 가장 잔인한 진압작전이 광주에서 펼쳐졌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는 권력을 쫓는 자와 이에 맞서 살고자 했던 약자의 피비린내 나는 격돌의 장소가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오랜 세월동안 ‘무장 폭도들에 의한 소요사태’로 매도당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땅에 묻힐 수 없었고,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김사복 씨와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와 같은 사람들의 용기에 의해 조금씩 드러났다.
1980년 광주의 봄은 여타의 도시와 다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5월 18일 전남대학교 앞에 배치된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했을 뿐 아니라 시민에게도 폭행을 가해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하기 시작했고, 도심곳곳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고, 도심은 화재로 뒤숭숭해졌다. 5월 21일 금남로와 충정로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이 벌어지고, 시민군은 전남도청을 사수하며 계엄군과 맞서 싸웠다. 5월 26일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워 도청으로 향했고, 시민대표들은 맨 몸으로 막아냈다. 5월 27일 계엄군은 도청을 향해 재진입하였고, 1시간 남짓한 교전 후 수많은 시민군이 이름도 없이 시신으로 남겨졌다.
5.18 진상규명,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 책임자 처리 등 사후처리에 대한 학생, 시민, 정치권의 요구는 끈질기게 지속되어 ‘광주의 봄’은 민주화의 불꽃이 타오를 때까지 매년 다시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6.29 선언을 이루어냈다.
1988년 제6공화국은 5.18 민주화운동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으로 6.25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정부는 ‘광주사태’를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하고 피해보상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6월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광주청문회를 실시하였으나 전두환의 백담사 은둔 등으로 마무리되었고, ‘진상규명’의 공은 다음 정권으로 넘겨졌다.
문민정부 출범 후 1995년 12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최초 발포명령, 헬기사격 등의 진상규명은 밝혀지지 못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의혹이 추가되었다.
2018년 3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지 37년이 지났지만 아직 실체적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실질적인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근에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광주사태’에서 ‘5.18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평가가 바뀌기까지 앞선 세대는 뜨거운 눈물과 핏물을 흘렸고,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1997년 5월 5.18민주화운동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되면서 매년 공식 기념식이 열리게 되었고, ‘망월동 묘지’는 ‘국립5.18민주묘지’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에게 실질적인 보상이 지원되었다. 그리고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5.18 기록물이 등재되면서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은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진보에 기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