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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곳  판문점

판문점은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공동경비구역(JSA)으로서, 회담이 개최되는 건물을 포함한 그 주변의 장소를 말한다.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개최한 이후 판문점에서 진행된 휴전회담은 협정체결시까지 159회의 본회담,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등 총 765회의 회담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한국(조선)군사정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이 날 조인된 정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대한뉴스 제1250호]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1979, CEN0004740(3-1))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제1250호]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1979)

남과 북이 바라보는 창(窓)

판문점에는 「정전협정」이후 본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고 위반사건을 협의·처리하기 위해 휴전 관리기구인 군사정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 측 대표단은 서울에, 공산측 대표단은 개성에 본부를 두고 공동 일직장교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 상주하도록 하였다. 공동 일직장교는 매일 정오 공동 일직장교회의를 열어 업무 연락사항과 양측 대표단 사이의 전달사항을 교환하였다. 이때의 판문점은 남북 간에 긴장 상태가 조성될 때마다 쌍방의 공식적인 유일한 대화 창구가 되어 무력충돌을 막아주는 안전지대로 존재하였다.

  • 판문점 회담(1957, CET0056242(1-1)) 참고 이미지
  • 판문점 회담(1957)
  • 87차 판문점 회담(1958, CET0056238(1-1)) 참고 이미지
  • 87차 판문점 회담(1958)

최초의 남북간 직접적인 대화가 1971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위한 사전 접촉으로 남북한적십자 단체의 파견원들이 문서전달을 위해 이곳에서 접촉한 것이다. 이후 판문점은 남과 북이 접촉하고 회담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남북왕래의 통과지점으로 이용되었다.

지금의 판문점 모습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1951년 10월 판문점이 처음 회담장소로 사용된 때에는 천막으로 시작되었다. 휴전협상이 장기화되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세워졌고, 이후 남북간 대화와 왕래의 장소로 사용되면서 여러 가지 시설들이 갖추어 졌다. 가장 먼저 남측에는 ‘자유의 집’이, 북측에는 ‘판문각’ 등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자유의 집’은 1965년 9월 30일 준공된 팔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된 2층 건물이었는데, 1998년 지상 4층, 지하 2층 규모로 증축되었다. ‘판문각’은 1968년에 건립되었다.

  • 자유의집 전경(1968, CET0031049(5-1)) 참고 이미지
  • 자유의집 전경(1968)
  • 판문점 자유의집(1975, CET0039530(4-1)) 참고 이미지
  • 판문점 자유의집(1975)

1980년대에 남북대화가 잦아지자 남쪽에 ‘평화의 집’이, 북쪽에는 ‘통일각’이 들어섰다. 평화의 집은 1989년 12월에 3층으로, 통일각은 1985년 8월에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건축되었다.

현재 판문점은 남북분단의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로써 관광지로도 활용되고 있다. 판문점을 관광지로 운용하겠다는 계획은 1970년 교통부에서 수립하였다. 당시 판문점 관광은 외국인 30인 규모의 단체관광으로 국한되었으나 지금은 만11세 이상의 남녀를 대상으로 국가정보원 대공상담소에서 방문신청을 받고 있다.

판문점 출입 절차 규정(안)(1980, BA0137605(6-1)) 참고이미지
판문점 출입 절차 규정(안)(1980)

금기(禁忌)를 깨고 판문점을 넘은 사람들

판문점은 「정전협정」이 진행되는 당시에는 초가집 몇 채만 있었던 외진 시골에 불과했지만 이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역사적인 장소로 바뀌었다.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판문점에서 발생하였고 지금도 판문점은 자유로운 접근이 금지된 채 ‘침묵 속 긴장감’이 깔려있다.

긴장이 감돌던 1967년,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 제242차 본회의를 취재하던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이 극적인 탈출을 감행하였다. 그는 위장간첩으로 1969년 사형되었지만 정전협정 이후 판문점을 넘은 최초의 민간인이었다.

판문점의 긴장이 극에 달했던 순간도 있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UN군 제3초소에서 2명의 미군이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동경비구역 안에 군사분계선이 그어졌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폐쇄되었다.

한편, 1989년 8월 15일 평양축전에 참가했던 전대협 대표 임수경 양과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으로 귀환한 사건도 있었다. 이들의 과감한 행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판문점을 통과한 남한의 첫 민간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분단의 시작에서 분단의 끝으로

문민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판문점이 자주 언론에 등장하였다. 1993년 3월 19일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가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에서 북측으로 인도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지미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1차 북핵위기를 중재하고자 6월 15일 판문점을 통과하여 3박 3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1996년 12월 30일에는 강릉에 침투한 무장공비의 유해 24구를 판문점을 통해 북측으로 전달하였다.

[대한뉴스 제2016호] 남북정상회담((1994, CEN0001986(1-1)) 참고 이미지
[대한뉴스 제2016호] 남북정상회담(1994)

1998년 6월 16일, 10월 27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극적인 모습이 뉴스에 보도되었는데 그의 방북은 남북한 교류협력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판문점에서의 가장 역사적인 장면을 손꼽는다면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일 것이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하였고, 2018년 4월 27일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의 ‘평화의 집’에서 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과거 판문점은 분단과 냉전의 결과물로 기억되어 졌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남과 북을 갈라놓은 장소가 판문점이었다면, 다시 하나 되게 하는 장소가 되길 기대해본다.

(집필자 : 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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