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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서울의 역사와 함께 하다 숭례문

2008년 2월 10일 밤 우리나라 국민들은 가슴 아픈 비보를 접했다. 600년 이상 서울의 상징이었던 숭례문이 화재로 2층 누각 전체가 타버린 것이다.
토지 보상 문제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이 저지른 방화 로 일어난 숭례문 화재는 초동 진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2층 누각이 전소되고 말았다. 불타는 숭례문의 모습을 현장에서나 TV로 지켜본 국민들은 모두 분노와 함께 슬픔을 느꼈다. 숭례문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세워져 600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숭례문은 이후 5년간의 보수기간을 거쳐 2013년 5월에 다시 제 모습을 찾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숭례문의 역사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숭례문은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 남대문이라는 별칭이 더 익숙한 숭례문은 그 크기가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문 위로 2층 누각을 지었다. 이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형태이고 처마에 많은 공포를 장식한 다포(多包)집 양식을 하고 있다. 숭례문의 현판 글씨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으로 도성을 옮기고 성을 쌓으면서 4대문을 만들었는데 숭례문은 그중 남쪽 문으로 그래서 ‘남대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숭례문은 목멱산(현재 남산)과 인왕산이 내려와 만나는 서남쪽의 고개에 세워졌는데, 도성의 정남쪽에는 목멱산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지형적 여건에 맞춰 서남쪽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산줄기가 만나는 지형적 조건 때문에 땅을 파 지대를 평평하게 만든 다음 문루를 세우고 성곽을 이었다.
숭례문은 2년 만에 지었는데, 지어진 지 50년만인 1447년(세종 29)에 2년간의 공사를 통해 대규모 개축을 하였다. 이때 숭례문의 주변을 높이고 문 위의 누각을 크게 수리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숭례문의 보수는 31년 후인 1479년(성종 10)에 또 한번 이루어지는데 이때는 누각이 기울어져 개축이 필요했다고 한다.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것을 이 때 우진각 지붕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후 숭례문은 고종 때까지 별다른 수리 기록이 보이지 않은 채 400여년을 이어오다가 1868년 경복궁 중건 때 한차례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건물의 일부 나무가 고종대의 나무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후 숭례문은 기울어가는 조선의 운명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898년 12월에는 종로에서 용산을 잇는 전차길이 생겨 전차가 숭례문을 관통하였다. 1904년에는 숭례문 앞에서 다시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선로가 부설되어 숭례문은 사람, 마차, 말, 전차 등이 뒤섞여 지나가는 매우 복잡한 통행로가 되었다.
사람과 전차가 함께 통과하다 보니 전차사고가 연이어 일어났고 이에 1907년 숭례문의 양옆 성곽을 허물게 되었다. 이 성곽 철훼(撤毁)는 친일파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언듯 보기에는 복잡한 교통상황을 정리하려 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곽 철훼를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의 상징성을 없애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숭례문 좌우의 성곽 철훼는 1909년에 완료되었으며, 바로 뒤를 이어 주변에 원형 석축을 건립하는 공사가 진행되어 1910년에 완료되었다. 이 원형 석축은 2008년 숭례문 화재 이전까지 있었는데, 이로 인해 숭례문은 문의 기능을 잃고 사방으로 뻗은 도로의 한가운데 섬처럼 외롭게 서있게 되었다.
1910년에는 숭례문 앞에 위치하고 있던 인공 연못인 남지(南池)를 매립하였다. 이 연못은 숭례문 앞에 위치하여 화재에 대비하는 방화수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풍수적 해석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상징적으로 설치된 시설이었다.

남대문 전경 참고 이미지
남대문 전경(1948)
남대문 중수준공식 참고 이미지
남대문 중수준공식(1963)
남대문 전경 수입협의 참고 이미지
남대문 전경 수입협의(1976)

국보 1호 숭례문

6.25전쟁 때 숭례문은 한차례 크게 훼손되었다. 숭례문을 중심으로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박격포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다행히 건물 전체가 붕괴되지는 않아 1953년 4월부터 9월에 걸쳐 긴급 보수를 행했는데 이때는 자원이 부족하여 임시방편으로 부서진 곳만 수리한 정도였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숭례문을 해체 보수하는 큰 공사가 있었다.
1962년 12월 숭례문은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보호법 참고 이미지
문화재보호법(1962)
새로 단장된 남대문 참고 이미지
새로 단장된 남대문(1963)

일제강점기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하여 우리나라 문화재 중 가치가 있는 것을 보물로 정하였는데 이때 숭례문이 보물 1호였다. 1955년에 정부는 이들 중 유형문화재를 모두 국보로 승격시켰고 1962년 국보에 번호를 정하면서 숭례문은 국보 1호가 되었다. 숭례문의 국보 1호 선정에 대해서는 일제의 잔재를 고민없이 답습했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었으나, 숭례문이 수도 서울을 600년 이상 변함없이 지켜온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국보 1호로서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국보재지정(서울 남대문외) 참고 이미지
국보재지정(서울 남대문외)(1962)
서울 남대문(국보 제1호) 현황조사 보고 참고 이미지
서울 남대문(국보 제1호) 현황조사
보고(1983)

2006년 숭례문은 일제에 의해 철책이 둘러진지 근 70여년 만에 남쪽에 광장을 설치한 후 일반에게 공개되어 사람들이 드나드는 옛 기능을 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2008년 2월 10일 밤 숭례문은 화재로 인해 2층 누각이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1층 누각과 석축은 무사하여 5년간의 복원공사 끝에 2013년 5월 숭례문은 제 모습을 찾았다.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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