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메뉴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1970-80년대 아침을 깨운 새마을 노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매일 아침 6시, 동네 마다 확성기를 통해 ‘새마을노래’가 흘러나오면 사람들은 너도 나도 삽이나 빗자루를 들고 자기 앞마당과 동네 청소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지방장관회의를 통해 새마을운동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우리나라 고유의 협동풍습인 향약과 계·두레·품앗이 등을 지목하였고, 민중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협동체를 조직하여 사회개혁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노총 새마을운동실천 선언식 썸네일 이미지
노총 새마을운동실천 선언식(1972)
경기도 이천 중포리 배진갯마을 새마을사업 썸네일 이미지
경기도 이천 중포리 배진갯마을
새마을사업 (1972)
제주도 중문 새마을사업 썸네일 이미지
제주도 중문 새마을사업(1972)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슬로건으로 한강의 기적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농가의 소득배가운동 등 농촌 근대화를 일으키자는 의도였다. 이후 도시·직장·공장에까지 확산되어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새마을운동은 ‘가난으로 부터의 탈출’을 희망하던 국민의 요구와 ‘조국근대화’를 추진하던 국가의 의지가 결합되어 짧은 시간에 많은 성과를 이뤄냈으며, 현재는 80여개 개발도상국가에 전수되는 국가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새마을운동의 태동

광복 후 우리나라의 국민 1인당 총생산은 1945년 50달러, 1950년대 65달러, 1960년대 85달러 수준으로, 경제적으로는 세계 최하위에 있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연평균 9%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탈농현상’과 ‘도시빈민문제’ 등 사회구조적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국가적 시도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1970년 4월 22일 ‘새마을가꾸기’를 국가정책사업으로 정하고 전국 3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6포씩을 공급했다. 다음 해 사업성과가 우수한 마을 16,600개를 선정하여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추가로 지원함으로써 마을의 등급화와 차등 지원이라는 새마을운동의 추진원리를 수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초기에 사업 단위를 협동의 관행이 있는 마을 단위로 정했다는 점이 성공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정부는 1973년 1월 16일 새마을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에는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새마을 뉴스] 농촌소득증대와 일자리 제공으로 도시와 농촌 격차를 줄이기 위한 새마을 운동 썸네일 이미지
농촌소득증대와 일자리 제공으로 도시와 농촌 격차를 줄이기 위한 새마을 운동(1973)

새마을운동 발자취

새마을운동은 애초 농촌의 초가집 없애기, 돌담을 블록 담장으로 바꾸기, 좁은 골목길과 비좁은 농로 확장, 퇴비증산, 농기구의 근대화 등 농촌 살리기에서 시작됐으나 1974년부터는 산업현장의 생산성을 높이고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한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976년에는 도시지역의 공동체의식을 높이고 새마을운동의 범국민화를 위해 ‘도시 새마을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새마을운동은 짧은 기간 급속도로 파급되었다. 1980년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해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되어 민간주도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새마을사업추진을 위한 지방행정조직 조정 썸네일 이미지
새마을사업추진을 위한 지방행정조직 조정(1973)

그러나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방만하고 정치권력형적인 운영행태로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뭇매를 맞기도 했다. 1989년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로 대체되고, 기구조직도 대폭 정리·조정하였다. 이후 국민의 무관심과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하기 위하여 1991년 「새마을지도자 윤리강령」을 제정했으며, 1996년 지방 조직의 법인화, 정치적 중립 명문화 등 조직을 정비하고 사회공익활동을 강화하는 등 새로운 운동 방향을 모색하였다. 새마을운동 제창 41년인 2011년 3월 3일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 개정을 통해 ‘새마을의 날(4월 22일)’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했다.

2000년대 새마을 운동은 개발도상국에 수출되는 국가브랜드

2000년대에 들어 새마을운동은 공공정책적 사업과 저개발국가 지원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한 개도국의 협력요청이 쇄도하였고, 미얀마, 말라위, 우간다 등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방한하였다.

새마을교육실천보고회 썸네일 이미지
새마을교육실천보고회(1974)
대구 도시새마을활동 썸네일 이미지
대구 도시새마을활동(1974)
새천년 새마을전진대회 썸네일 이미지
새천년 새마을전진대회(2000)

2013년 12월 기준으로 세계 143개국 56,000명이 새마을 교육을 이수하였으며, UN 세계식량기구(World Food Programme, WFP)와 UN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United Nations Economic and Social Commission for Asia and the Pacific, UNESCAP) 등은 빈곤퇴치 모델로 새마을운동을 채택하였다. 2013년 1월 우리의 새마을운동 경험을 국제사회와 공유하여 지구촌의 절대빈곤 퇴치에 기여하고자 새마을세계화재단이 설립되었다. 새마을세계화재단은 2015년 9개국(에티오피아, 르완다, 탄자니아, 세네갈,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37개 마을에 새마을 시범 마을을 조성하고 있으며, 향후에는 라틴 아메리카에도 새마을 운동을 전파할 계획이다.

또한 한국국제협력단(KOICA)도 개발도상국들의 농업 생산성 향상과 생활개선, 농촌 개발 등에 힘쓰고 있는데, 새마을운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한국형 밀레니엄 빌리지’ 사업을 추진 중이다. ‘밀레니엄 빌리지(새천년마을계획)’란 미국 컬럼비아대의 제프리 삭스(Jeffrey David Sachs) 교수가 주장한 것으로, 2015년까지 지구촌의 빈곤과 질병을 절반 이하로 줄이자는 지역개발 사업이다. 유엔은 우리의 새마을운동을 바탕으로 한 '밀레니엄 빌리지계획'이라는 아프리카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2013년 6월 18일에는 새마을운동 기록물 22,084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이 추진한 새마을운동 관련 문서와 사진 및 영상물로, 유엔세계식량계획(WFP)과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UNESCAP)는 새마을운동이 빈곤퇴치를 위한 민관협력의 성공적 사례라는 점을 등재 결정의 주요 요인으로 보았다.

유네스코는 “새마을운동은 당시 최빈곤 국가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는데 초석이 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인류사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 과정을 담은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농촌 근대화에 관한 종합적 기록이자 빈곤 퇴치와 농촌 부흥을 위한 매우 귀중한 자원”라고 평가했다.

(집필자 : 남애리)

참고자료

  • facebook
  • twitter
  • print

주제목록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