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1월 28일 밤. 서울의 밤거리는 유독 어둡고 적막했다. 명동, 무교동, 충무로, 시청 앞 등 서울 시내 번화가의 네온사인이 70% 이상 꺼졌다. 이날 오후 7시쯤 한국전력의 가두 방송차는 동네 좁은 골목까지 누비고 다니며 절전을 호소했다. 불 꺼진 도심의 빌딩, 행인이 줄어든 거리는 유류파동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했다. 당시 석유곤로에 석유를 구하지 못해 다시 연탄난로를 들여놓은 집들도 많았고, 석유통을 들고 주유소마다 즐비하게 사람들이 늘어서기도 했다.
43년 전 우리는 석유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활 곳곳에서 절실하게 느꼈다. 물론 지금 석유파동이 온다면 사뭇 다른 모습일 것이다. 2016년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석유수입국이자, 세계 7위의 석유 소비국으로서 높은 중동 의존도로 인한 석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지난 1980년부터 석유비축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6년 3월 말 현재 전국 9개의 석유비축시설에서 93백만 배럴의 비축유를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산유국의 상황에 따라 석유가 무기화되는 예전의 석유파동을 비산유국인 우리나라는 언제든지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73년 10월 16일 석유수출국기구(OPEC : 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는 일방적으로 원유가격의 인상을 결의해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하여 종전의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인 17일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한다고 발표하면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원유 가격의 급등은 더해져서 1974년 7월 1일 OPEC의 석유 수출 가격은 사우디아라비아 기본유종(아라비안 라이트 34도)을 기준으로 배럴당 11.65달러로 고시되었는데, 이는 1973년 10월 수준의 4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것이 제1차 석유파동이었다. 1차 석유파동은 자국의 유전에 대한 영구적인 주권을 주장하는 산유국과 세계 대부분의 유전을 지배하고 있는 국제석유자본 간의 오랜 대립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메이저는 국제석유회사(International major oil company)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미국 계열의 엑슨사, 모빌사 등 4개 자본과 영국 계열의 브리티시석유회사 자본 및 영국·네덜란드 계열의 로열더치셜사 자본 등 6대 석유자본이 활약하고 있다.
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세계경제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크게 떨어져 서방 선진국은 마이너스성장을 하게 되었고, 세계적인 불황과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으며, 국제수지도 대폭적인 적자를 기록하였다. 1차 석유파동은 서방세계의 중동외교노선이 친이스라엘에서 친아랍으로 기울게 만들었으며, 국제석유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 결정권을 OPEC가 장악하게 되어 자원민족주의가 강화되었다.
1차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인상되자 그동안 채산성 문제로 시추를 미루어왔던 북해유전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영국,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이 산유국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고, 소련과 힘을 합해 비 OPEC 전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OPEC의 영향력이 계속 확대되기를 원했던 13개의 OPEC 산유국들은 1978년 12월 17일 원유가를 총 14.5%를 올려 14.542달러까지 인상했다. 동시에 석유 공급의 15% 수준을 차지하고 있던 이란이 국내 정치 및 경제적 혼란을 이유로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그해 12월 27일 전면적인 대외 석유금수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원유가격은 배럴당 20달러 선을 돌파하고 현물시장에서는 40달러에 육박하여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되었다.
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978년 4.0%에서 1979년에는 2.9%로 낮아졌다. 선진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0.3%를 기록했고, 개발도상국의 경우 32.0%의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1차 석유파동보다는 특히, 제2차 석유파동 때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우리나라는 해외 의존적 경제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불황 속의 물가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경제 불황 속에서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상태)이 나타났다. 1975년 소비자 물가는 전년대비 24.7% 상승하였으며, 국제수지는 18.9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물가 조정을 미뤄왔던 정부는 1973년 12월 4일 석유류 값의 30% 인상 등 10개 품목의 가격 인상과 함께 일련의 안정대책을 발표했다. 당시 물가조정에서 전력 5%, 배합사료 25.5%, 분유 10.8%, 설탕 16.7%, 비료 30% 폭으로 인상했는데, 이는 가정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석유류와 전력 등 에너지 가격의 인상은 전체 공산품 가격과 버스 등 대중교통 요금, 화물 수송비 인상을 가져왔으며 사료값, 비료판매가격 인상은 축산물 가격과 농업 경영비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가정경제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석유난로를 쓰던 가정은 등유 값이 28% 올라 겨울철 난방비 걱정이 늘었다. 석유를 사기 위해 석유통을 2∼3개씩 들고 주유소를 찾아 몇 미터씩 줄을 서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래도 석유를 구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주부들은 유류값 인상이 곧 생필품 값 인상을 가져올 것이라 예상하고 화장지, 비누 등을 마구 사들여 각종 생필품이 동이 나고 말았다. 석유 파동의 심각한 여파를 국민들은 물가 쇼크로 실감했다.
더불어 정부는 에너지 절약정책도 펼쳤다. 자동차의 운행을 줄이기 위해 구급차, 취재차, 외국인차를 제외한 8기통 이상의 고급 승용차는 일체 운행을 금지시켰으며, 승용차의 공휴일 운행도 전면 금지시켰다. 또한, 시내버스의 정거장 구간도 이전보다 더 멀게 조정했으며, 택시 윤번제 운행도 실시했다. 연탄 16만 톤에 해당하는 양의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초·중·고등학교는 유난히 긴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유류가격 인상과 유류 공급의 대폭 감량으로 보일러 가동을 단축한 공공건물과 병원 등에서는 석유나 연탄난로를 새로 설치했으며, 관공서는 보일러 가동 시간을 하루 평균 6시간으로 단축했는가 하면 전등을 3분의 2이상 줄여 오후 4시가 지나면 추위와 어둠 때문에 거의 일손을 놓고 퇴근시간만을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모두가 어려운 상황일 때 유독 한 군데 업체만은 호황을 누렸다. 자동차 대신 기름이 안 먹는 자전거 쪽으로 눈길을 돌린 사람들이 많았다. 관공서나 일반 회사에서는 자전거 출퇴근 붐이 일어 많은 자전거들이 팔려나갔다. 정부에서는 자전거 보급 확대를 위해 차 없는 거리를 만드는 방안을 연구하는 등 정책적인 차원에서 자전거 보급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정부는 석유파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1974년 1월 14일 대통령긴급조치 제3호인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조치는 저소득자에 대한 조세부담의 경감 등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와 사치성 소비의 억제, 자원의 절약과 개발 및 노사간의 협조강화 등 건전한 국민생활 기풍의 진작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신속히 취함으로써 격동하는 세계경제의 충격에 따른 국민경제의 위기를 국민의 총화적 참여에 의하여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2차 석유파동은 우리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1979년 경제성장률이 6.5%로 하락한 데 이어 1980년에는 마이너스 5.2% 성장을 기록했고, 물가상승률은 30%나 됐다. 이렇듯 2차 석유파동 후 피해가 더 컸던 것은 1차 석유파동 후에도 실질적인 경제의 체질 개선에 소홀했고 중화학공업정책을 강행하여 경제규모의 확대에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에너지원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에너지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것이다. 이에 정부는 국가차원에서 장기적이고 적극적인 에너지 대책을 마련했다. 석탄과 석유, 수력, 원자력, 대체에너지 개발은 물론이고 해외 에너지 자원의 개발까지 종합적이며 체계적인 에너지 정책을 전담하고 추진할 정부조직이 필요했다. 그 결과, 1977년 12월 16일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1978년 1월 1일 동력자원부가 신설됐다. 이후 정부에서는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과 위기 대응능력 배양, 해외 자원개발 및 신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에너지 절약 등 큰 틀에서 더욱 강도 높은 에너지다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동력자원부는 상공자원부, 통상산업부, 산업자원부, 지식경제부를 거쳐 현재의 산업통상자원부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