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1988년에 제24회 하계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한 바 있다.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놓고 보면 당시 우리나라의 올림픽 개최는 일대 사건이라고 할 만한 실로 역사적인 이벤트였다. 변방의 어디쯤 있는 지도 잘 모르고, 전쟁으로 인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알고 있던 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한다니!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전 지구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한국이란 나라는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단순한 국제스포츠행사로 끝난 게 아니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수출경쟁력과 문화, 국가이미지 등 각 분야에서 결정적인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이 서울올림픽이 끝난 1988년 말에 또 다른 국제행사인 박람회 준비를 시작한다. 각종 국제행사를 통해 국가의 위상과 품격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기 위한 교섭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 문제는 처음부터 비관적 의견과 반대론자들의 벽에 부딪쳐야 했다. 우선 신청기간이 너무 촉박하고 비용문제 때문에 국제사회의 여론도 부정적이어서 아예 다음으로 미루자는 말까지 나왔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우리 정부는 반드시 한국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논리개발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국제박람회는 사실상 부유한 선진국 위주의 축제였다는 점에 착안, 이제는 개발도상국의 참여도 이끌어내야 하는 시점임을 일깨우면서 한국은 그 당시 이미 경제협력기구에 가입하기 위해 교섭을 하고 있다는 부분도 강조해 나갔다.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국제박람회 개최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잇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고, 이것이 곧 국제박람회기구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주효했다. 박람회의 주제로 채택된 슬로건은 ‘새로운 도약에의 길’이었다.
마침내 1989년 12월에 열린 제106차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우리나라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그 조사단의 보고서를 토대로 1990년 8월 총회에서 대전세계박람회를 공인한다는 결정이 만장일치로 내려졌다. 이로써 대전엑스포는 개발도상국에서는 사상 처음 개최하는 국제박람회가 되었다.
원래 세계박람회 또는 만국박람회로 불리던 이 국제행사는 이제는 ‘세계엑스포’ 또는 그냥 ‘엑스포’가 공식적인 명칭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열리고 있는 일종의 ‘국제공인 구경거리 장터한마당’과 같은 것으로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다루는 ‘등록박람회’와 보다 제한적이고 분명한 주제를 가진 ‘인정박람회’로 나누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따낸 1993년의 대전세계박람회 즉 ‘대전엑스포’와 2012년에 개최된 ‘여수세계박람회’는 ‘인정박람회’가 되는 셈이다.
특히 참가국이 꾸미는 국가별 전시관은 그 나라의 국력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큰 볼거리로 언제나 박람회의 하이라이트이다. 그만큼 나라마다의 자랑거리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개최국의 위상과 발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대전엑스포는 1993년 8월 7일에서 11월 7일까지 93일간 대전의 대덕연구단지 일대에서 열렸다. 주제는 ‘새로운 도약에의 길’이었고, 부제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었다. 그래서 대전엑스포를 일명 ‘과학엑스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전엑스포에는 세계 108개 국가와 33개의 국제기구, 그리고 우리나라 200여 개 기업이 참가했고, 국내외에서 1,450만 명이 관람했다.
결과적으로 이 행사에서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의 국가품격 내지는 국가이미지의 업그레이드는 물론 과학기술과 경제, 문화, 환경, 지역발전 등 여러 분야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산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대전엑스포는 생산유발액 3조 643억 원, 소득유발액 1조 2,500백억 원, 고용창출효과 21만 2,000여 명 등 경제적 효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고, 또 수입유발액은 4,455억 원으로 국제수지 개선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왔다. 개최도시인 대전은 새로운 수요창출과 도시기반 정비, 시민의식 향상 등 눈에 보이는 변화와 함께 과학기술 분야의 성장잠재력을 갖춘 도시로 거듭나게 됐다.
대전엑스포는 기존의 엑스포 방식이나 내용과 달리 개최국의 국력과시보다는 창의성에 중점을 두는 형태의 엑스포를 시도해 참가국들의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세계박람회 사상 가장 뛰어난 ‘정보화 엑스포’로 평가받았다. ‘IT강국’ 한국의 위상을 유감없이 발휘해 모든 관리와 운영을 전산시스템으로 처리했다.
두 번째 세계박람회인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가 그로부터 약 19년 뒤인 2012년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이 역시 대전엑스포 이후 한국에서는 두 번째로 치러지는 국제박람회기구 ‘인정박람회’였다.
대전엑스포가 사상 처음으로 이른바 선진국이 아닌 개발도상국에서 개최된 것이었다면, 2012년의 여수엑스포는 한국의 도약을 상징하는 국제박람회였다고 할 수 있다. 대전엑스포 이후 19년 동안 한국은 얼마나 발전했으며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전 세계에 보여주는 그런 박람회였다. 처음 유치경쟁에 고배를 마시고 두 번째 신청에서 천신만고 끝에 개최권을 획득, 개최지인 여수시는 정부의 지원 아래 신항만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도시개조작업에 들어갔다.
주제는 ‘살아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으로 정해졌고, 이 때문에 ‘여수해양박람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제관, 국제관, 한국관, 국제기구관 외에 해양생물관을 만들어 바다를 주제로 한 박람회임을 보다 분명하게 부각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조용하던 남쪽 바닷가의 항구도시가 일약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장소로 변신했다. 몰려드는 관람객들을 위해 고속열차 KTX가 운행되었고, 전 세계에서 한류(韓流) 붐을 일으킨 K-팝 가수들의 공연이 박람회 기간 내내 이어졌다. 한국의 세계화와 글로벌화의 한마당이 해안과 해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 향기가 함께 어우러져 세계로 뻗어나가는 우리나라의 위상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