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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소리, 세계에 이름을 남기다

해녀문화, 세계문화유산이 되다

잠녀 혹은 해녀라고 부르는 이들은 산소공급장치와 같은 특별한 장치 없이 빗창, 갈고리, 정게호미와 같은 도구만 갖고 바다에 들어가는 나잠어법(裸潛漁法)으로 소라, 전복, 미역, 톳 등을 채취하며, 가끔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다.

  • 제주도 해녀
  • 제주도 해녀
    (1957)
  • 부산 해녀
  • 부산 해녀
    (1975)
  • 제주도풍경 : 해녀
  • 제주도풍경 : 해녀
    (1978)

2009년에 제정된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문화 보존 및 전승에 관한 조례」에 따르면, ‘해녀란 수산업협동조합의 가입자로서 제주특별자치도 안의 마을 어장에서 잠수하여 수산물을 포획·채취하고 있거나 과거에 이와 같은 일에 종사하였던 여성’으로 되어 있다. ‘해녀문화는 제주해녀들이 물질과 함께 생활에서 생겨난 유·무형의 문화유산’으로 규정하였다. 해녀문화에는 물속에 들어가는 나잠기술과 어로에 관한 민속지식, 노래, 작업 도구와 옷, 공동체의 습속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바다 속에 잠수해 해산물을 채취하는 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적으로 널리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생계를 위해 특별한 장비 없이 바다 속에 뛰어들어 물질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 밖에 없다.

,2014년 4월 문화재청은 유네스코에 ‘제주 해녀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다. 그 결과, 2016년 10월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의 평가기구가 ‘제주 해녀 문화’에 대한 등재 권고를 결정하였고, 같은 해 11월에 에티오피아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등재를 최종 결정함으로써, 제주해녀문화는 우리나라에서 19번째로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 문화’는 산소공급 장치 없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문화와 공동체의 연대를 강화하며 해녀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잠수굿, 물질을 나가는 배 위에서 부르는 해녀노래, 모녀 및 세대 간에 전승되는 여성의 역할 등이다. ‘제주 해녀 문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이런 문화가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을 상징하고, 자연친화적인 방법으로 지속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며 관련지식과 기술이 공동체를 통하여 전승된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는 2017년 5월 ‘해녀’를 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로 등록하였다.

한라문화제(배, 해녀) 한라문화제(배, 해녀) 한라문화제(배, 해녀) 한라문화제(배, 해녀)
[대한뉴스 제1104호] 한라문화제(배, 해녀)(1976)

해녀의 역사

해녀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직업 중의 하나로 인류가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 시작한 원시산업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해녀의 존재는 옛 문헌의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문자왕과 관련된 문헌에 해녀가 등장하고 고려 숙종 때인 1105년에는 ‘해녀들의 나체 조업을 금한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인조 때는 제주목사가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그 시절에는 해녀뿐만 아니라 해남도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해녀와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해남은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등으로 불렸다. 제주도는 고려 때부터 전복과 미역을 왕실에 공물로 받쳤는데, 미역은 주로 해녀들이 땄고 전복은 포작인들이 담당하였다. 공물로 바쳐야 하는 전복의 할당량이 꾸준히 늘어나자 뭍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많아졌고, 이에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을 뭍으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출륙금지령」을 내렸는데, 1629년부터 이후 200년간 계속되었다. 제주도 여성은 뭍으로 시집을 갈 수도 없었으며 제주도에서는 어선 건조마저 금지되었다. 이 모두가 공물을 제대로 받기 위함이었다.

제주도의 「출륙금지령」이 풀린 것은 1850년 무렵으로 이때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뭍으로 상경할 수 있었다. 제주도 해녀들도 부산, 울산 등 경상남도 등지로 일정기간 돈벌이를 위한 출가(出嫁)를 시작하였다. 처음 시작은 경상도 일대였고, 이어 강원도를 거쳐 청진까지 동해안 일대를 누비며 북상하였고, 남해안, 서해안 및 울릉도, 흑산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해안을 전부 찾아가 물질을 하였다. 해녀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각지와 블라디보스토크, 요동반도의 다롄, 산둥성의 칭다오까지 진출하였다.

삶의 무게 짊어진 해녀

제주도에서 해녀는 특별한 누군가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대체로 어머니가 해녀이면 딸도 해녀, 시어머니가 해녀이면 며느리도 해녀가 되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7세에서 8세가 되면 바다에서 헤엄치기와 물속에서 팔다리를 놀리며 떴다 잠겼다 하는 무자맥질을 배운다. 12세에서 13세가 되면 해녀인 어머니로부터 두렁박을 받아 얕은 데서 깊은 데로 헤엄쳐 들어가는 연습을 했다. 15세에서 16세가 되면 물질을 시작해 비로소 해녀가 되고 17세에서 18세가 되면 한몫 잡이의 해녀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물질은 40세 전후에 가장 왕성하며, 대체로 60세 전후, 어떤 경우에는 70이 넘도록 물질을 하기도 한다. 해녀가 되었다고 전부 물질을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질의 기량 및 숙련도에 따라 제주 해녀는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의 세 집단으로 구분된다. 상군 해녀는 오랜 기간 물질을 하여 기량이 뛰어나 아래 해녀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며 해녀공동체를 이끈다.

  •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해녀)
  •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해녀)
    (1970)
  • 제주도 해녀2
  • 제주도 해녀2
    (1972)

해녀들이 한번 무자맥질하여 들어가는 바다의 깊이는 보통 수심 5m 정도이다. 한번 들어가면 30초쯤 작업하다가 물 위에 뜨곤 하지만, 필요하거나 능력이 되면 수심 20m까지 들어가고 2분 이상 물 속에서 견디기도 한다. 이렇게 한번 들어갔다가 물 위로 솟을 때는 ‘호오이’ 하면서 한꺼번에 참았던 숨을 몰아쉰다. 이 소리가 특이하다 하여 ‘숨비소리’, ‘숨비질소리’라 부른다.

물질에 필요한 도구는 해녀들이 부력을 이용하여 가슴에 안고 헤엄치는 ‘테왁’, 채취물을 담는 자루 모양의 ‘망시리’ 또는 ‘망사리’가 있다. 해녀들이 무자맥질을 할 때 이 ‘테왁’과 ‘망시리’는 물 위에 띄워둔다. 그 밖의 기구로는 전복 등을 캐는 길쭉한 쇠붙이 모양의 ‘빗창’, 해조류를 베는 ‘정게호미’라는 낫, 조개 등을 캐는 쇠꼬챙이 갈퀴인 ‘갈고리’ 등과 물고기를 쏘아 잡는 ‘소살’이라는 작살이 있다. 요즘 해녀들은 고무로 된 잠수복을 착용하지만 이전에는 ‘물옷’이라는 면으로 된 잠수복을 입고 물에 들어갔다. 물안경은 1950년대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해녀가 물질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농사일도 겸하였는데, 농사일을 하는 사이에 물때에 맞추어 바다로 나가 물질을 했다. 제주도 속담에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제주도 해녀들의 삶은 팍팍했다.

해녀의 고령화와 지구온난화, 어촌 자원의 고갈과 어려운 작업 환경으로 현업 해녀의 수는 감소세이지만, 제주해녀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국내외에서 해녀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 한라문화제에서 해녀들
  • 한라문화제에서 해녀들
    (1988)
  • 성화를 들고 뛰는 해녀
  • 성화를 들고 뛰는 해녀
    (1988)
  •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제주 민요: 동김령리 해녀노래)
    (1989)
(집필자 : 황은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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