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21일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충격적인 특별 기자회견을 가졌다. 우리 정부는 국제 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나라 빚이 총 1,500억 달러가 넘는데, 우리가 가진 외화는 4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뒤이어 12월 3일 우리나라는 IMF로부터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승인받았다. 더불어 국제부흥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이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이 4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여 총 350억 달러의 국제기관의 지원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12월 4일 긴급히 55억 달러가 공수되었다. 그리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호주에서 추가로 200억 달러가 지원되어 총 550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우리는 국제적으로 550억 달러의 빚을 진 채무국가가 된 것이었다.
이로써 간신히 국가 부도 사태는 면했지만, IMF는 우리나라에 가혹한 경제 구조조정을 요구 했다. 기업들이 무너지고 은행들이 도산했다. 수많은 주식들이 휴지 조각이 됐고, 일자리를 잃고 가족에게 알리지 못해 양복을 입은 채 산에 갔다가 퇴근하는 가장들의 ‘등산출근 현상’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국민들은 달러가 없어 나라가 부도날 수도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 때, 정확한 시발점은 알 수 없으나 대한제국기의 국채보상운동처럼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다. 금은 곧 달러처럼 쓸 수 있으니, 장롱 속에 잠자고 있는 금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확산된 '외채 상환 금모으기 운동'은 1998년 1월부터는 KBS 방송국의 ‘금 모으기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전 국민이 보상과 헌납의 방식으로 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결혼반지와 돌반지가 나왔고, 운동선수들은 금메달을 내놨다. 김수환 추기경도 금으로 된 자신의 십자가를 내놨다. 부모의 등에 업혀온 코흘리개 아이부터 백발의 어르신까지 수백 만의 국민이 금모으기에 동참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금반지를 내놨고 재외동포들까지도 합세했다. 그렇게 온 국민이 모은 금이 석 달 동안 227톤으로 18억 달러 어치, 현재 기준으로 2조 5천억 원어치였다. 금모으기에 동참한 사람 숫자만 약 351만 명이었다. 금모으기운동은 실제적으로 외환위기 탈출의 발판이 되기도 했으나, 하루 속히 나라 빚을 갚고 금융위기를 극복하자는 국민들의 단결력을 보여준 사례로, 외국인들에게는 ‘불가사의한 한국인의 힘’의 하나로 인상에 남았다. 2015년 8월 한 방송사(MBC)에서 ‘광복 70주년 대국민 의식조사’를 했는데 광복 이후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은 ‘월드컵 4강 진출’이었고, 그 뒤가 88 올림픽개최, 세 번째가 ‘IMF 극복, 금모으기 운동’으로 꼽혔다.
IMF 사태로 인해 15대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일어났고, 1998년 우리의 경제성장률은 –6.9%를 기록했다. 국민생활에 밀접한 변화로는 프로야구나 프로배구 등도 팀이 해체되고, 과자 등 식료품 가격이 크게 인상됐다. 요식업계에는 IMF국밥 등 IMF 수식어를 단 염가메뉴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취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바뀌게 되었다. 기존에는 공무원은 대기업에 비해 급여가 적어 인기가 없었으나, 하루아침에 구조조정을 당해 대량 해고 사태를 겪는 대기업 사원을 보면서 안정된 직장의 공무원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IMF에 구제금융 요청을 하기까지에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우리의 미숙함이 있었다. 1994년 우리나라 경제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상태였고, 여러 가지 경제지표도 좋은 편이어서 외환보유량을 거의 바닥까지 낮춰도 큰 위험이 없으리란 판단 하에 보유하고 있던 외환을 아무 걱정없이 쓰고 있었다. 그러나 1997년 태국부터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위기가 닥쳤다. 특히 태국과 인도네시아에는 국내의 제조업체들도 많이 진출해 있었고 은행, 종합금융사들도 진출해 있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3개월짜리 단기대출을 얻어 1년 이상 장기대출을 해주고 2~3%의 이자차익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남아 외환위기로 외자조달이 중단되었고, 대출회수는 불가능해졌다. 외국 금융회사의 부채상환 독촉에 몰린 종금사들은 국내에서 대출을 회수해 외채를 상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외환보유고가 고갈되어 대외지급불능상태(Moratorium)에 빠지는 중대한 위기에 처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종금사들이 동남아 시장에서 어떤 영업행위를 하는지, 대출규모가 얼마인지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
1998년 2월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IMF의 개입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외환위기'때 39억 달러까지 떨어졌던 외환보유액은 이듬해인 1998년 말 520억 달러로 증가했다. 1998년 12월 IMF 긴급 보관 금융에 18억 달러를 상환한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금융 위기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갔다. 우선 단기성 고금리 차입금인 보완준비금융(SRF) 135억 달러를 1999년 9월에 조기 상환하였고, 60억 달러의 대기성차관자금(SBL)을 2001년 1월부터 상환하기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 8월 23일 1억 4,000만 달러를 최종 상환하였다. 이로써 2004년 5월까지 갚도록 예정되어 있던 국제통화기금 차입금 전액인 195억 달러를 조기에 상환하였는데, 이는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3년 8개월 만으로, 당초 예정보다 3년 가까이 앞당겨 국가채무를 정리한 것이다.
2000년 12월 4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였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이후 2001년 8월 23일 대한민국에 대한 IMF 관리 체제는 종료되었다. 강력한 구조조정과 금융시장의 전면적인 개혁을 통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받은 구제 금융을 모두 상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3년 8개월의 시기는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으나,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일치단결하는 모습도 나타났으며, 과거의 무사안일주의가 타파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2015년 6월 말 현재 한국은행은 우리의 외환보유액이 3,747억 5,000만 달러로 세계 6위 수준이라고 발표했다.